[호의현] 데드엔딩
한쪽 눈에 감각이 없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자국 대신 핏자국이 뚝뚝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옆구리를 붙잡는다. 갑주를 입었는데도 깊은 상처다. 지혈이 되질 않는다― 내장이 흘러나오지 않아야 할텐데. 화살 맞은 눈동자는 웃기게도, 예전 전쟁에서 상흔을 입었던 쪽의 눈동자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시력은 보존했지만 결국 이렇게 잃을 눈이었던 거겠지.
형님께선 언젠가 제게 호랑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제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호랑이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산군山君이라니 지나친 과장이십니다, 이리 무리 하나 이기지 못하니까요.
그러니 저는 호랑이가 아닙니다…….
어전의 황좌까지는 수 십 걸음 정도가 남았다. 황좌의 분홍색 머리카락, 모란이 훤히 보인다. 옆의 백사는 제 주군 대신 핏물을 죄 뒤집어 썼으니, 이제 백사가 아니라 눈동자의 색처럼, 적사라 불릴 지경이었다.
아아, 이 난세의 주범은 너로구나. 난세의 간악한 책사. 긴 소매를 들어올려 웃는 입꼬리를 가리며, 뱀은 혀를 날름거린다.
"폐하, 알고 계신가요? 산에 불을 지르면 멧토끼나 산새처럼 연약한 것들은 재빨리 눈치채고 도망간답니다.
헌데 산군이란 것들은 제 영역을 지키겠답시고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그 속에서 활활 타 죽습니다.
자아, 영특하신 우리 폐하. 범고기는 무슨 맛일까요?"
황제가 아프자, 형제들이 차례차례 죽어갔다. 황위를 놓고 황자들간의 싸움이 치열해졌다.
물론 그들은 모란호의 직접적인 형제는 아니었다. 촌수로 보자면 사촌이겠지. 그 공공연한 사실에 의해, 모란호는 황제에 의해 전쟁터로 쫓겨난 것이다. 몇 년 간 전쟁터에 갔다 오자 형제의 절반이 죽었고, 남은 절반의 대부분은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불구가 되어 한미한 지방으로 쫓겨나 있었다.
의현 형님이 살아 계시단 건 좋은 소식이었다. 과연 모란의현, 그 몸가짐과 태도가 올바르고, 외가인 연평 윤씨를 필두로 청백리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죽을 일은 없었겠지. 나 같은 것은 처음부터 황제가 될 수도 없었고, 다른 황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은 모란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모두 갖춘 의현 형님이야말로 황제다. 활짝 풍성하게 핀 화중왕花中王, 진정한 모란일 것이다.
모란 호는― 아니 목단 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필두로 민심을 얻고, 중앙의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호는 부단히 애썼다. 모두 의현을 위해서였다. 그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다(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는…… 왕좌지재가 되고 싶었다. 의현은 문관들의 마음은 전부 가져간 듯 했지만, 무관의 마음은 빼앗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군부를 통솔하여 의현의 아래에 들어간다면, 의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실로 문무 모두가 인정하는 황제가 즉위할 터였다.
일은 쉽지 않았다. 남아 있던 황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을 그저 우연이라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했으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암계를 쓴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호는 그저 이것을 좋게 해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와 의현의 경쟁자를 없애 준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들의 조력자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가장 황제에 가까웠다고 믿었다. 의현이 미약하게 불안감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것이 패착이었다. 뱀이 제 자신을 꼭꼭 숨겨가며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었던 것이다…….
의현이 독살당했을 때, 그는 처음에 그것이 그저 나쁜 꿈인 줄로만 알았다. 언제나 아름답던 형님이 입에서 피를 한 줄기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저 자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몸을 흔들어도 의현이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색이 다른, 유리구슬처럼 투명하던 두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었다. 물빛처럼 아름답던 한 쪽 눈과 제비꽃을 닮은 한 쪽 눈은 이미 그 빛을 잃고 혼탁함으로 가득 찼다.
아아―…. 이제 그 청명한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언제나 내게 지어 보이던 그 웃음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긴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로 저녁놀처럼 희미하게 보여주던 그 기쁨도, 나를 칭찬하며 머리를 헤집던 그 부드러운 손길도……. 두근거리며 뜨겁게 느껴지던, 제 몸 아래의 그 체온도 영영 이별이었다. 화중왕 모란은 채 찬란하게 필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꽃봉오리 상태일 때 그만 꺾여,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호는 하늘을 보았다.
의현이 죽었는데도 그가 좋아하던 푸르른, 천청색 하늘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얄궂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황자는 호정뿐이었다. 호정의 옆에 항시 붙어다니던 백색증 책사를 떠올려냈다. 도저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백사를.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검을 쥔 손에 감각이 없었다.
호는 당장 이끌 수 있는 군은 모두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백사의 술수가 먼저였다. 호정은 단 하나뿐인 황자라며 마침내 황위에 올랐고, 호는 반역자가 되었다. 단 하루만의 일이었다. 그의 최측근들은 전부 하나씩 따로 불러져, 여러가지 사인으로 죽었다.
결국 그는 혼자서 황궁을 가로지를 수 밖에 없었다.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날아오는 화살을 전부 검으로 쳐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몇 대가 몸에 꽂히고 갑옷에 꽂혔다. 그러나 수 십의 병사를 오로지 복수심으로 모두 도륙해낼 수 있었다. 그가 가는 길이 온통 핏빛이었다. 전쟁터에서처럼, 호는 모든 병사들을 쳐내고 어전으로 향했다. 그곳에 백사가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배가 베이고 허벅지가 베인다, 등이 베이고 온 몸에 화살이 꽂힌다. 한쪽 팔은 쓸 수 없다. 심장은 아직 멀쩡하지만 어느 솜씨 좋은 사수가 눈에도 화살을 꽂았다. 그는 지금 죽으러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혼자 죽지 않을 것이다. 의현의 복수를 해야 했다. 두근거리며 심장이 뛰는 한 그는 의현의 장수이자 아우이자 연인이었다.
"보세요, 폐하. 저것이 범의 최후랍니다. 가엾게도, 다리 한 쪽을 질질 끌며 다가오고 있네요. 몸의 피란 피는 다 흘리면서요. ……네에, 굳이 병사를 부를 필요도 없지요. 제 장담하건데 이 곳에 닿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질 테니까요. ………눈을 가리지 마세요, 폐하. 이것이 당신이 황제가 되고 싶다고 했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진 임금이 되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렇다면 먼저 임금이 되셔야지요.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린 것 아닙니까. 무서우신가요, 폐하? 당신이 벌인 일을 확실히 마주하셔야죠. 뭐, 확실히 남의 피며 자기 피며 다 뒤집어 쓴 저 모습은 범보다는 흉흉한 야차에 가깝군요. 네에, 그럼 가려 드리겠습니다. 아직 마음이 여리신 당신이 보기엔 일렀던 것 같기는 하네요. 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 자가 마지막이니까요."
"극악무도한…… 백사―! 널…… 죽이고, 의현 형님의…… 복수를…… 하겠다."
"극악무도하다니, 너무하셔라♪ 나는 난세의 간웅. 이제 난세가 끝났으니 치세의 능신. 나야말로 왕좌지재였던 것이다. 억울한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말 한 마디를 내뱉기도 벅차다. 숨이 찬다.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편해지자고 속삭인다. 속삭임은 의현 형님의 목소리를 띄고 있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검으로 바닥을 받쳐 가며, 나는 한 발자국씩 앞으로 향한다. 아직, 아직이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형님은 더 힘드셨을 거야. 이곳을 웃으며 내려다보는 백사가 방심할 때까지. 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조리 써서 저것의 바람을 이루지 못하게 할 때까지.
앞으로 한 발자국.
순간, 나는 바람처럼 온 몸의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다 앞으로 향하며 검을 휘둘렀다.
백사는 당연히 자신을 향할 줄 알았으나 호정을 향하여 휘둘러지는 검을 보고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네 녀석이 왕좌지재라고? 웃기는 소리.
의현 형님이 모란이 되지 않으시면, 그렇다면, 이 세상엔 어떠한 모란도 존재할 수 없다.
온 힘을 다한 검은 복대에 가로막혀 베고자 했던 상대를 벨 수 없다. 리는 준비성이 철저했다. 그는 언젠가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배에 복대를 차고 있었다. 충성을 다하는 주인을 위해 대신 칼침을 맞기 위해서.
"하하―… 복수,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가…."
"원통한가요?"
"그, 래……."
"그러나 호정 폐하께선 제 보좌에 힘입어, 역사에 다시없을 성군이 되실겁니다. 감사히 여기세요, 당신들은 훌륭한 모란을 단 한 송이 피우기 위한 비료였으니까요."
"……형, 님……."
"산군이 아니라 부나방이었군요. 모란꽃 향기에 이끌려 그것이 뜨거운 업화인지도 모르고 몸을 불살랐으니."
"………의현, 형………."
……
………
형님.
의현 형님.
분홍빛 머리카락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익숙한 뒷모습이다. 햇빛이 형님을 가득 비추고 있다. 푸르른 하늘이다. 쨍쨍한 햇빛에 잠시 눈을 뜨지 못하다 이윽고 나는 달려간다.
형님을 품에 끌어안기 위해서.
내 인기척에 형님이 몸을 돌린다. 환히 웃으며 날 맞이한다.
실로 행복한 나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