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화
누군가는 그림자와 어둠이 모여 태어난 것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의 악의가 모여 태어난 것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죽음이 강림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아를 갖게 된 그것은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괴물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어떠한 욕구도 없었습니다. 다만 지나가면서 본 동물들을 흉내낼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흰 눈토끼를, 그 다음에는 사슴을, 그 다음에는 늑대를, 그 다음에는 곰을.
토끼와 사슴은 늑대와 곰에게 먹혔습니다. 생명이 끊긴 것에는 관심 없었습니다. 늑대와 곰을 흉내내자, 그것들이 고기를 나눠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늑대도 곰도 제 무리와 고기를 나눠 먹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생명을 흉내내고 생리적 욕구를 흉내내던 그것이 처음 느낀 감정은 고독함이었습니다. 제 아내와 같이 있는 늑대처럼, 제 새끼들을 보살피는 어미곰처럼 자기 같은 것과 붙어 있고 싶었으나 동물들은 그것을 무서워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한동안 늑대로 변해 숲을 돌아다니다 인간들을 만났습니다. 인간은 제법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그를 보고 기겁하여 도망가고 불을 들고 떼거지로 찾아와 괴물을 무찌른다고 이러저러 말을 하지 않습니까. 괴물이란 명칭이어도 이름은 이름, 괴물은 기뻤습니다. 자신을 정의내릴 말이 생긴 것이니까요.
나는 괴물이다.
괴물은 이름 지어준 인간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것도 재밌어 보였고요. 같이 있어 보고 싶었습니다. 괴물 상태로는 무리였으니 인간을 흉내내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리 살티코프는 탄생했습니다. 비쩍 마르고 퀭해 죽어가던 인간 하나를 잡아다가 낼름 삼켜 먹었거든요. 그 인간의 이름이 유리 살티코프였습니다. 괴물은 인간을 먹어 인간 사회의 지식을 깨우친 것입니다.
검은 머리, 붉은 눈에, 자신을 죽이려 내려오던 장군들, 병사들을 흉내 낸 외향을 감고 유리는 인간 사회로 내려갔습니다.
인간의 몸은 추위를 탔기에 유리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태양빛이 따스하게 비추는 수도로 갈 생각이었어요. 그곳은 인간이 더 많다고 하기에요.
인간 나라는 한창 공주님 얘기로 떠들썩했습니다.
왕국에는 세 왕자님이 계셨는데, 공주가 없어 아쉬워하던 왕과 왕비님이 막내 왕자님을 공주님이라 불렀다고요. 실제로 막내 왕자님은 아름답고 총명하시며 착하고 다정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귀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유리는 왕국을 돌며 생각했어요.
그런 귀한 보물이 어떤지 내 눈으로 직접 보겠다.
그리하여 유리는 대책 없이 왕국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병사들에 의해 제지당했지만요. 유리는 고개를 들어올려 공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테라스 밖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던 공주님은 그야말로 금빛 같은 찬란한 금발, 태양 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습니다. 흰 피부가 반짝이는 듯한 착각을 받으며 유리는 욕망했습니다.
저것이 탐이 난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것을 갖겠다.
유리는 병사들에게 호언장담했습니다.
“내가 꼭 공을 세워 다시 돌아오리다. 그때 너희는 이 문을 열어 나를 공주에게 안내해야 할 것이다.”
공주님의 것과는 다른 피와 같은 짙은 붉은 색 눈동자에, 병사들마저도 얼마나 덜덜 떨었는지요.
이 년이 지나 유리는 장군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병사에서 장군이 된 유리의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야, 유리는 일반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혁혁한 공을 세워 돌아왔거든요. 거대한 산맥의 마수를 백 일밤 낮을 잠도 자지 않고 피투성이로 천 마리를 베어 넘긴 일, 국경 전쟁에 한 번 참전해 국경 근처의 땅을 전부 돌려받은 일, 변경백이 화염계로 암살당할 뻔한 상황에서 반격하여 첩자들의 목을 전부 베어넘긴 일……. 바다의 괴수를 잡아 없애고, 식인 괴물을 죽이고, 도적단을 토벌한 일 정도는 자랑할 거리도 되지 못했습니다.
장군이 된 유리는 백작의 지위를 하사받았습니다.
왕은 유리를 매우 칭찬하며 귀족 지위 말고 다른 것도 줄 테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였습니다.
하필이면 무엇이든 준다고 호언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습니다.
“공주님을 주십시오.”
그렇게 공주님은 괴물이라는 소문이 도는, 어둡고 검은, 유리 백작에게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백작령은 아주 북쪽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춥고 험한 땅이었어요.
추위를 많이 타는 공주님은 백작이 혼인 선물로 준 흰여우의 털로 만든 코트를 몸에 칭칭 감고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첫째 왕자님과 둘째 왕자님이 매우 걱정했지만, 공주님은 애써 의연한 태도로 백작령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마차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성에서 본 유리 백작은 너무 무섭게 생겼었거든요.
어두운 머리카락, 무섭게 생긴 얼굴, 피 같은 붉은 눈동자, 거대한 덩치, 무시무시한 목소리…….
어머니가 그는 괴물이 아니냐며 걱정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유리 백작은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이 있다던데 진짜일까, 사실은 밤마다 괴물로 변한다던데. 그렇게 큰 손에 맞으면 날아갈지도 몰랐습니다.
공주님이 훌쩍훌쩍 울었지만 마차는 금세 백작령에 도착했습니다.
무섭게 생긴 유리 백작은 공주님을 깨지기 쉬운 수정구슬처럼 안아들고 방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공주님은 밤새 한 숨도 잠들지 못했지만요. 백작은 아마도 잠든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백작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주님을 세상 가장 귀한 것으로 대했을 뿐이었습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공주님을 아꼈습니다.
그래서 공주님도 백작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백작은 무뚝뚝하고, 사람의 마음을 잘 몰랐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감정에 무지하고 잔혹함만 배워왔을 뿐이었습니다. 밤마다 공주님이 해주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고, 공주님이 말하는 것을 따르도록 노력했습니다. 백작은 공주님에게서 연민과 겸손과 친절과 인내와 절제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도 배웠습니다.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괴물은 생각했습니다. 그 햇빛 같던 보물을 가져 온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요.
백작은 그의 품에 들어오는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희고 부드러운 인간이 좋았습니다. 공주님은, 블리스 플레쳐는 전부가 그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연유로 이루어진 디저트 같았습니다. 반짝이는 금발도 좋았습니다. 태양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 눈동자도 좋았습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좋았습니다. 섬세한 손길도 좋았습니다. 미소가 좋았습니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를 염려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바이올린 연주가 좋았습니다. 집중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이런! 끝이 없겠군요.
공주님 또한 이 서투른 괴물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공주님을 사지로 보내버린 왕과 왕비와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는 매우 걱정했습니다.
저잣거리에는 유리 백작이 괴물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왕자는 신하로부터 유니콘의 뿔을 받아왔습니다.
부정한 것, 괴물을 구별해내는 유니콘의 뿔은 닿은 자의 본모습을 보여 주는 귀한 아이템이었습니다.
둘째 왕자는 이것을 잘 포장해 불쌍한 동생에게 보냈습니다. 셋째 왕자, 왕국에서 가장 귀한 것, 소중히 키워온 아름다운 공주에게요. 네가 걱정되어 보냈다며, 한 번 써 보라고, 사용하건 사용하지 않건 백작이 괴물이 아니라면 어떠한 손해도 보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내심 공주님도 그것을 구분짓고 싶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봐온 유리 백작은 무섭긴 했지만 괴물은 아니었으니까요. 이것을 꼭 쓰고 결과를 알려달라는 둘째 왕자님에게 확고하게 대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백작은 괴물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그 날 밤, 사실은 잠 들수 없는 괴물이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던 그날 밤, 공주님은 잠든 척 배게 아래에서 유니콘의 뿔을 꺼내 백작에게 가까이 댔습니다.
뿔이 괴물에게 닿는 순간, 온 백작령, 아니 온 북쪽 땅에 다 들리게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백작의 성은 어둠으로 몰려들었고요, 달빛도 별빛도 횃불도 전부 사라져서 온 일대가 어두컴컴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당황했고, 어둠은 뭉치고 뭉쳐 성을 휘감더니 무서운 굉음을 내며 땅을 가르고 사라졌습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난 뒤 흐린 달빛을 맞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유리 백작이었습니다. 아니, 괴물이었습니다. 괴물은 온 몸에 화상 흉터를 입은 채로 으르렁댔습니다. 무서움에 벌벌 떨며 공주님은 주저앉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배신했다.”
공주님이 유니콘의 뿔을 썼다!
유리 백작은 괴물이었다! 괴물이 맞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모든 재앙은 그가 꾸며낸 짓이다!
공주님은 그에게 붙잡힌 것이다!
눈을 감은 괴물은 그렇게 화형당했습니다.
왕자님들과 왕비님이 아무리 공주님을 달래 주어도 눈물만 나왔습니다.
잠이 들면 꿈에 검은 표범이 나와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대가 나를 배신했다.”
다음 날 꿈에도 검은 표범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를 찾아낸다면, 그대는 나를 살릴 수 있으리라. 나는 죽었되 죽지 않았으니.”
잠에서 깬 공주님은 몰래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아름다운 긴 금발은 금세 엉망이 되었고, 옷은 너덜너덜해졌지만, 공주님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공주님이 골목으로 들어가 더러운 빵을 한 입 먹었을 때였습니다. 왠 노란 고양이 하나가 그 앞에서 공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배고프니?"
자기도 먹은 것이 별로 없어, 이틀만에 말라비틀어진 빵 하나를 침으로 녹여 가며 먹고 있었으면서, 다정한 공주님이 말했습니다. 고양이는 마치 공주님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러더니 고양이는 공주님 곁으로 다가 와 옆에서 몸을 말고 앉았습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생명체의 온기에 공주님 또한 빵을 다 먹고 그 옆에서 잠깐 선잠이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거든요.
꿈에서, 공주님 옆에 앉아 있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왠 남자였습니다. 남자는 일어나서 공주님 맞은편으로 가더니 오크 통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공주님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불쌍한 꼴이구나, 공주야. 사랑하는 부부가 그런 꼴이 되었으니 내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도와주러 왔다. 너는 네가 그런 꼴이 되었어도 불쌍한 축생을 돕는 착한 마음의 소유자구나."
남자가 손을 뻗자 검지손가락으로 작은 파랑새 한 마리가 내려와 앉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도와 주마, 네 남편, 유리를 찾고 있지?"
꿈 속에서, 공주님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남자는 픽 웃더니 대답해 주었습니다.
"유리는 죽었다. 너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무조건 걷고 있더군. 맞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유리는 지하 세계, 흔히들 말하는 지옥에 있지. 지하 세계는 죽지 않는 이상 내려갈 수 없지만, 이 세계에서 딱 한 군데, 죽지 않고도 내려갈 수 있는 곳이 있다. 그 길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작정 걸어라, 걷고, 또 걷다 보면 네게 말을 거는 동물 세 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 동물들이 원하는 댓가를 준다면 너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말과 함께 공주님은 잠에서 깼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고양이의 온기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만이 올라올 뿐이었습니다.
"추워..."
중얼거리며 공주님은 바이올린을 들고 다시 길에 나섰습니다. 공주님의 꿈은 영험했습니다.
꿈을 믿으며, 공주님은 다시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말을 거는 동물이 나올 때까지, 발길 닿는 데로 걸었습니다.
하염없이 걸은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요?
어느 깊숙한 숲길에서, 공주님은 하얀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펄쩍 내려오더니 대뜸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몸에 감고 있는 그 흰 여우 털을 내놔!”
거만한 태도, 분노한 태도였습니다. 공주님은 깜짝 놀랐으면서도, 순순히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건네준다면 그것은 자선이지요, 정보를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릴게요, 드리라면 드릴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남편을 찾고 있으니, 남편의 행방을 알려 주신다면 기꺼이 드리지요, 북쪽으로 갈 수록 춥고 추워 얼어붙어도 남편을 찾는다면 금방 녹아내릴 테니까요.”
“뻔뻔스럽고 가증스럽긴!”
흰 고양이는 벌컥 화를 내며 공주님을 할퀼 듯이 뛰어올랐습니다.
“네가 몸에 감고 있는 흰 여우털이 내 남편이야!! 내 남편을 잡아 죽인 그 괴물이 죽었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그러니 내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공주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으면 주지 않을 거에요, 남편을 찾지 못하면 저는 춥고, 외롭고, 이 어두운 겨울 숲을 계속 걸어야 하니까요.”
고양이가 날뛰어봤자 인간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마구 날뛰던 흰 고양이는 마침내 지쳤습니다. 그리고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좋아, 좋아. 네 남편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지 알려 주마.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 또 걸어라. 걷고 걸어 오래된 석탑이 나오면 그 아래 바쳐진 석류를 먹어. 그러면 남편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의 말에 공주님은 몸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흰 여우털가죽을 건냈습니다.
털가죽을 받자마자 고양이는 울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내 남편을 살릴 수 있다! 얼마나 원통했던가! 공주여, 네 남편은 그 업을 받아 너는 더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것이다!”
공주님이 남편을 어떻게 살리냐고 묻기도 전에 고양이는 사람으로 변해 털가죽을 안고 숲 안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추위가 몰려왔습니다. 공주님은 몸을 떨며 다시, 그저 걸었습니다.
사흘 밤낮을 잠들지도,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걸어간 공주님은 마침내 고양이가 말한 석탑을 발견했습니다.
석탑 아래에는 정말 흰 백합 한 다발과 붉은 석류 한 알이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지친 공주님은 석류를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석류를 먹자 꾸벅꾸벅 잠이 쏟아졌어요.
공주님이 잠들었다 일어나니 밤이었습니다.
공주님은 그제서야 석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흙과 먼지, 이끼와 풀에 뒤덮혀 몰랐지만 이 곳은 무덤가였습니다. 잊혀진 무덤가라 금방이라도 유령이 나올 것 같았지만 눈을 감고 꾹 참았습니다.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나는 남편을 찾으러 간다, 유리 백작을 찾으러 간다. 그런데, 정말로 무덤가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얘, 있잖아, 일어나 봐, 얘.
공주님은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이 끼익 쓰러지는 소리, 풀숲이 헤쳐지는 소리…무엇인가 이 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얘, 있잖아, 신기해라, 너는 뭐니? 얘, 얘. 자고있지 않은 걸 알아, 말동무나 되어주렴? 얘, 얘, 무시하지 마! 내 이야기를 들어 주렴?
공주님은 무시하고 바이올린을 켰습니다. 무덤가의 유령들이 얘기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잡생각이 많아 이런 환청을 듣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참 집중해서 바이올린을 켜도 한밤중은 한밤중,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얘!”
발 밑에서 흰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기에 공주님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헉! 아야….”
“깜짝 놀랬지? 깜짝 놀랬지~! 미안해! 그런데 얘, 너는 무엇이니? 너는 무엇이길래 아름다워?”
자세히 보니 흰 것은 족제비였습니다. 흰 족제비 한 마리가 공주님께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안심했습니다. 족제비는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나는 말이야, 나는 말이야?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거든.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이곳에 혼자였어. 그런데 너! 너는 무엇이니? 너를 보니 그리워, 나도 너같이 두 발로 서서 두 팔을 써서 살았던 것 같아, 나도 너 처럼 머리에 빛나는 것이 달려 있었던 것 같아.”
“그렇구나, 외로우셨겠어요. 저는 블리스 플레쳐, 인간 왕국의 삼왕자에요, 제 머리에 이건 머리카락이구요, 아마도 당신도 틀림없이 인간이었었겠죠.”
“인간! 그렇구나, 나는 인간이었어. 너처럼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이 길게 길게 있었어. 뭐, 너도 예쁘지만, 지금의 나도 예쁘지만, 인간이었던 나는 분명 무척이나 아름다웠어! 모든 사람이 나를 예쁘다, 예쁘다 해 줬어.”
“그렇구나, 정말로 아름다우셨겠죠.”
“응, 응. 그래서, 그래서 누가 날 데리고 왔어, 아프게 했어, 추웠어… 그래서 여기에 묻혔어, 힘들었어. 외로웠어. 차가웠어.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까 이렇게 됐단다?”
흰 족제비는 기뻤는지 공주님의 주위를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 자그마치 열여덟 바퀴나 돌았답니다. 공주님의 눈도 빙빙 어지러웠습니다.
“만세! 기억났어! 기억났다!” 하면서 돌던 족제비는, 멈추더니, 다시 한 번 더 공주님에게 다가와 품에 안겼습니다.
“얘, 얘. 있잖아? 너는 왜 여기에 있니? 네 이야기도 들려 줘, 그 바이올린도 다시 켜 줘.”
“저는 죽은 남편을 찾아 떠나고 있어요. 혹시 그 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요? 저는 그 이를 제발 다시 한 번 만나야 해요.”
“그거라면, 그거라면? 나도 알고 있지! 너와 같은 건 본 적 없지만 죽은 것들이 가는 것은 똑똑히 보았어! 아무도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 어두운 것! 그 무서운 것!”
“그렇다면, 제발 알려 주세요. 그 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어두운 것도 두렵지 않으니.”
공주님이 부탁했습니다. 족제비는 공주님의 품 안에서 꿈틀꿈틀거리더니 말했습니다.
“그래, 좋아! 알려줄게. 대신 부탁이 있어. 인간 시절 나를 찾아 줄래? 나를 꺼내 줘, 땅 밑은 너무 춥고 어둡고 외롭고 무서워, 블리스, 블리스. 나도 사랑하는 이가 있었지, 그 이가 보고 싶었어, 잠들면서 생각했어, 내가 여기서 잠들면 그 이가 분명히 슬퍼할 텐데, 내가 도망간 줄 알 텐데. 사랑하는 그 이에게 말하고 싶었어. ”
공주님은 족제비가 부탁한 대로 근처 땅을 팠습니다. 나뭇가지와 돌로 팠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족제비와 함께 손으로 팠습니다. 족제비가 가리킨 곳을 반나절 동안 힘차게 파고 나니 정말 해골이 있었습니다.
“이게 나야. 아름다운 머리카락도 없어. 불쌍한 나야. 블리스, 블리스.”
족제비가 말했습니다.
“네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내게 줘, 그럼 길을 알려 줄게, 그 머리카락을 이 해골 옆에 두어 주렴? 나를 사랑하는 그 이가, 내가 사랑하는 그 이가… 나를 찾아냈을 때, 알아볼 수 있게….”
“드리라면 드리지요,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고, 그 이는 내 머리카락이 짧다고 나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으니까요, 제게는 아직 피가 도는 살이 있고, 붉은 눈동자가 있고, 숨결이 있으니까요. 아름다운 머리카락보다 그 이를 다시 못 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족제비의 말에 공주님은 길고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잘라 해골 옆에 두었습니다.
“고마워, 고마워! 블리스, 블리스. 너를 잊지 않을게. 네 남편은 북쪽으로 향했어. 그 어두컴컴한 것은. 멀고 먼 북쪽으로. 그 백합을 들고 걸어가. 탑이 나오면 지하로 내려가. 그 지하가 저승이야. 알았지?”
족제비는 만족한 듯 해골의 갈비뼈 사이로 들어갔어요. 심장이 있을 부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재잘거리지 않았습니다.
공주님은 묵념을 한 번 하고 계속 걸었습니다.
하룻 밤 정도를 걷자 정말 추웠습니다. 공주님의 발은 다 부르트고 온 몸에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석류를 먹고 난 후 부터 어째서인지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공주님은 백합을 손에 꽉 쥐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마침내 탑이 보였습니다. 높은 탑은 고개를 올려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구름을 솟아올라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탑 주위를 빙빙 돌자 정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공주님이 탑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셋째 왕자.”
그러더니 무언가 날아 내려왔습니다. 거대한 독수리였습니다. 은빛 아름다운 독수리였습니다.
독수리는 금빛 눈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감히 산 자의 몸으로 지하로 내려가려 하는가.”
“그렇습니다, 독수리님. 저는 남편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이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거든요.”
“하지만 셋째 왕자여, 그대로 내려가면 안 될 텐데.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야.”
“어째서인가요, 독수리님?”
“석류를 먹고 백합을 들었지. 하지만 지하에는 길고 긴 망각의 강이 몇 줄씩 칭칭 감아 흐르고 있으니, 그 곳을 기억을 잃지 않고 지나가려면 뱃사공에게 돈을 내야 하지. 돈 없이 가면 너는 강에 빠져 영영 기억을 잃고 그 곳을 배회하는 처량한 혼령이 될 거야.”
그 말에 공주님은 창백해져서 온 몸을 뒤졌습니다. 돈 대신 줄 만한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바이올린밖에요.
“어쩌지, 어쩌지… 돈이 없는데, 금화가 없는데.”
그러자 독수리가 한 번 날아오르더니, 공주님 옆 나뭇가지에 앉아 속삭였습니다.
“플레쳐 가문의 셋째 왕자여, 그렇다면 거래를 하자. 내게 네 바이올린을 줘. 네 그 귀한 바이올린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도 기꺼이 좋아하며 받아줄 테니. 그 미소를 위해서라면 나는 금화 몇 개가 되건 네게 주겠다.”
“바이올린이라면, 바이올린이라면…”
공주님은 눈을 감았습니다. 왕과 왕비가 어렸을 적에 준 귀한 바이올린은, 죽은 나무의 요정으로 만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바이올린도 줄 수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작별 연주가 탑 근처에 퍼졌습니다. 매우 슬픈 곡조였습니다. 그 노랫소리에 독수리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고 지나가던 구름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흰 뱀도 먹이로 잡은 쥐를 놓아줄 정도로 슬펐습니다.
공주님은 독수리에게 바이올린을 건넸습니다. 독수리는 힘차게 날아오르더니 금화 자루를 공주님의 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네게 행운이 깃들기를.”
금화 주머니와, 백합을 손에 들고 공주님은 탑의 아래로, 아래로… 깊숙히 내려갔습니다.
태양이 보이지 않기에 공주님은 얼마나 내려갔는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다리가 아프면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나서 내려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공주님은 어느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지하의 어두운 강가에는 뱃나루가 하나 있었습니다.
“망자여, 이리 오세요.”
배 위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그를 불렀습니다. 공주님은 나지막하고 음울한 목소리에게로 걸어갔습니다. 공주님이 걸어가자, 뱃사공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망자가 아니로군요. 산 자는 이 곳을 건널 수 없으니, 돈이 있다 해도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는 망자가 아니지만, 죽은 그 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 이를 만나 할 말이 있어요. 저는 가야만 해요. 그러니 저를 죽은 이처럼 대하셔도 가만히 있겠습니다. 배를 타게 해주세요. 금화라면 있습니다.”
뱃사공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금화를 보고 공주님을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습니다. 공주님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빌었습니다. 공주님의 애달픈 울음에 뱃사공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공주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며,
“사실은 바이올린 연주가 들렸습니다. 매우 구슬퍼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동정합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 뿐입니다. 배를 태워 줄 테니, 그 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을 저승의 모든 것들이 알아차릴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목숨이니, 절대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지금부터입니다.”
공주님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습니다. 금화 주머니의 금화 두 개를 받고 뱃사공은 노를 저었습니다.
“이곳은 비통의 강 아케론, 원통함에 울던 망자여 어디를 가느냐, 돌아갈 수 없도다.
이곳은 시름의 강 코퀴토스, 강물에 비친 네 모습이 서럽더냐 망자여, 옛 일은 돌아올 수 없도다,
이곳은 불의 강 퓌리플레게톤, 태워라 태워라 망자여, 돌아갈 육신도 없느니.
이곳은 망각의 강 레테, 잊어라 잊어라 망자여, 아무것도 아닌 존재여, 잊어라 잊어라 삶을…
이곳은 죽음의 강 스튁스, 잠들어라 잠들어라 망자여… 너는 이제 이곳의 존재다.“
뱃사공이 속삭이는 노랫소리에 공주님은 도착했음을 알았습니다. 내릴 때도 금화 두 개를 건네주고 저승의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공주님은 입을 막고 어둡고, 컴컴하고, 축축하고, 불길하고, 위험하고, 먹을 것이라고는 없는 저승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유리를 찾기 위해서요.
아무리 찾아도 유리는 없었습니다. 이상한 유령과 괴물들이 공주님을 위협했습니다만 공주님은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쫓기고 더러워지고 넘어지고 다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외로웠지만 공주님은 달리고 달렸습니다. 유령과 괴물들은 공주님을 깜짝 놀래킬 수는 있어도 다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지만 찍 소리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공주님은 소리만 내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공주님은 걷고 걸어 어느 성에 이르렀습니다.
검은 성에서 잠깐 쉬어 가자, 먹을 것이라도 있으면 얻어 먹고… 침대가 있으면 잠시 몸을 뉘이자.
지친 공주님이 성에 들어갔습니다. 성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먹을 것도 잔뜩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잠깐 따뜻한 물에 씻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은 금방이라도 누군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치 공주님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요.
말 없이 씻고 먹고 부드럽고 비싼 침대에 누워 공주님은 잠에 빠졌습니다…
…블리스. 블리스.
꿈이었습니다. 공주님의 맞은편에 유리 백작이 앉아 있었습니다. 목줄에 매인 검은 개 한 마리가 컹컹 소리를 내며 짖어 댔습니다. 무서운 큰 개였습니다. 유리 백작은 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블리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블리스, 나를 배신했지, 하지만 나를 부르면, 내 이름을 한 번만 부르면 널 용서할게.
자, 블리스, 내가 누구지? 내게 말해, 네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공주님은 말을 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주님의 꿈은 영험하니까요. 공주님은 유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리 백작은 더욱 험악한 꼴이 되었습니다.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 공주님을 겁박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 말하란 말이다!
꿈 속의 공주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유리는 공주님에게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컹컹 들리고, 목줄의 쇠사슬이 달그락 당겨지고, 늑대와, 흑표범과, 거대한 뱀과, 박쥐와, 드래곤과, 사탄과, 염소 머리를 한 악마와, 검은 어둠으로 계속 변해가던 유리가 공주님을 위협해도 공주님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그 이를 만날 때까지 말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그때 컹 소리와 함께 큰 검은 개가 달려들어 기체를 물었습니다. 기체는 끔찍하고 기괴한 쇳소리를 냈습니다.
원통하다, 원통하다. 내가 되려고 했는데, 내가 유리 백작이 되려고 했는데.
그리고 공주님은 잠에서 깼습니다. 꿈 속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공주님은 성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자 본 적 없던 개 한마리가 공주님의 근처로 왔습니다. 꿈에서 본 개와 비슷하게 생긴 개였습니다. 따라오라는 듯 개가 달렸기에 공주님은 개를 따라 거대한 성을 휘저었습니다. 개는 벽난로를 통과하고 이상한 곳으로 꺾어 들어가고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더니……
어느 검은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거대한 문은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어요. 개는 낑낑대며 공주님의 다리를 밀었습니다. 공주님은 쇠사슬로 다가갔습니다.
이 안에 유리가 있는 것이 틀림 없어.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열쇠는 어디에 있지? 공주님이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주머니 안에 백합이 어느샌가 열쇠가 되어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자물쇠를 열어 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검은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매우 큰 방이 있었습니다. 알현실 같았습니다.
붉은 카펫을 밟고 가니 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검은 거대한 관이었습니다.
관뚜껑을 열자 유리가 있었습니다. 유리 백작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주 새근새근, 어떤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요.
그것을 보자 공주님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올랐습니다. 공주님은 며칠이고 참아왔던 목소리를 꺼냈습니다.
“유리, 유리….”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럽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유리, 보고 싶었어요, 유리, 미안해요… 유리, 제가 잘못했어요. 그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공주님의 솟아오르던 뜨거운 눈물이 유리에게 한 방울, 한 방울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생기 없던 유리의 몸이 꿈틀거렸습니다. 창백하던 피부에 피가 돌기 시작하고 차가운 몸에 열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펑펑 울며 고백하는 공주님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죽으러 왔어요. 유리. 당신이 없는 내 삶은 살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유리. 제가 옆에서 죽을게요.”
공주님이 미련 없이 칼을 찾으러 일어나려던 찰나… 마침내 유리 백작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더니, 눈을 떴습니다.
“블리스.”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눈에 담으며, 아니, 팔로 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으며.
“그래, 이 지옥에서, 영원불멸,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같이 살까? 평생 업보로, 내 곁에서. 햇빛도 못 보고. 미안하면 계속 그렇게 같이 살래?”
무서운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유리가 살아난 것이 믿기지 않는 공주님이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귀여운 나의 블리스, 울지 마. 네가 울면 내 마음도 칼로 저며지는 것만 같으니.”
유리가 큰 손으로 블리스의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은, 블리스는 펑펑 울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거짓말 같아서요. 꿈만 같아서요.
유리는 블리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습니다.
“나의 보물이 진정 나를 사랑해 나를 죽였다 살려냈으니, 나는 이제 왕이 될 수 있다.”
울음을 그친 공주님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유리는 아예 자신의 허벅지 위에 블리스를 앉혀 놓고 사근사근 대답했어요.
“나는 지옥의 왕자 유리 자그레우스Ζαγρεύς.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을 사랑하여 죽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는 인간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도 무릅쓰지 않으면, 나는 신이 될 수 없는 운명.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운명이다. 모든 것을 준 너의 사랑이 날 신으로 만들었고, 지옥의 왕 하데스로 만들었으니, 블리스.”
유리가 블리스의 손을 잡고는, 눈을 감고, 손등에 키스했습니다.
“나의 비, 나의 여왕. 너는 내 옆에서 이 저승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 붉은 눈빛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알고 있었을까요? 석류를 먹었기에 공주님은 스스로 저승에 온 것이 되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백합을 썼기에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되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그리고 꾹꾹 참아오던 숨결을 유리를 살리기 위해 썼으니 그 뜨거운 숨결은, 영혼이 담긴 뜨거운 숨결마저도 유리에게 준 다는 뜻이 되어버렸다는 것을요.
순진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가여우시고 귀한 공주님은 그렇게 저승의 왕비가 되셨답니다.
지상에서는 공주님을 그리워하시겠지만, 저승의 왕께서는 영영, 왕비를 보내시지 않으실 겁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자그레우스이자 새로운 하데스이자 자신의 아름다운 보물을 찾아 기억을 잃어서라도 지상으로 찾아온 저승의 왕이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야기꾼인 저, 마크 리와 여러분만의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