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주란] 팔척귀신 上
쨍한 햇빛이 손등을 뚫고 무릎팍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도 소용이 없어서, 태평은 그냥 포기하고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물감을 풀어 색칠한 것 같은 하늘엔 구름이라고는 없었다. 온통 하늘빛인 하늘이 바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 멀리서 매미가 맴- 맴- 하며 울어댔다.
관리되지 않은 시골집 마당의 짙은 회색빛 콘크리트에는 목에 사슬을 맨 백구 한 마리가 간간히 끼잉 소리를 내며 엎드려 자고 있었다. 백구 앞의 붉은 다라이에는 물 한 방울 없었다. 마을을 두 바퀴 도는 산책을 끝내고, 마당의 낡은 펌프로 물을 퍼내어 붉은 다라이를 물로 가득 채워 줬는데, 백구조차도 어찌나 더운지 다 마셔버린 그런 여름날이었다.
비단 개만 더운 것은 아니었다. 태평도 너무 더워서 할머니 몰래 아이스크림을 한 개 더 꺼내 먹었다. 이틀 전 태평이 할머니 댁에 올 때, 마을의 유일한 구멍가게에서 한가득 사 온 시원한 아이스크림들이었다. 소다 맛 쭈쭈바를 입에 물고 태평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봤다. 마당 한 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장소에는 뜨거운 아지랑이가 일고 있었다.
대청마루 끝자락에 앉아 있는 것은 지루한 일이었다. 태평은 이미 방학 숙제인 일기도 다 썼고, 수학 문제집도 다 풀었으며 해양 생물 백과사전은 원래부터 달달 외울 정도로 본 상태였다. 곤충은 잡았지만 불쌍해서 다 풀어 줬기에 곤충채집통은 빈 상태였다. 깔끔하게 세워져 있는 잠자리채와 곤충채집통은 돌아갈 때, 아마도 태평의 새아버지가 될 ■■아저씨의 차 뒷좌석에 실릴 것이다.
털털거리며 고물 선풍기가 더운 바람을 내뿜었다.
“아―”
태평이 하늘을 향해 아무 의미 없는 소리를 냈다가, 다시 쭈쭈바를 입에 물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잠깐 집을 비웠다. 태평은 백구 장군이를 산책시키고 집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두 분 다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공영방송만 나오는 오래된 고물 TV는 간혹가다 지지직거리며 먹통이 되어서, 결국 태평이 할 것이라고는 대청마루에서 무릎 아래를 까딱거리며 한쪽 발끝에 걸쳐진 운동화를 흔드는 것뿐이었다.
한가로운 여름의 한낮이었다. 2m를 조금 넘는 시골 담장은 태평에게는 너무나 높게 보였다. 언젠가 이 담장보다 커질 수 있지 않을까, 귀신고래 수인이라서 거대했던 덩치의 아버지를 떠올렸던 적도 있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것만 아니라면 태평은 아마 계속 그렇게 아버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희끄무레한 것은 마치 연기처럼 담장 위로 솟아 있었다. 태평은 그것이 연기거나 구름이거나 아니면 솜사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동그란 돔 모양의 위 모양만 잘라놓은 듯이. 어쩌면 엄청나게 키가 큰 할아버지의 흰 머리통일 수도 있었다. 왜냐면 실타래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장만큼 높은 할아버지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태평의 시야 저 먼 끝, 담장의 끄트머리 부분에 걸쳐져 있던 흰 것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추는 기색 없이, 그러나 천천히. 담장 옆면을 따라서,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며.
마치 태평이 자신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 기묘함에 태평이 눈을 깜빡거렸다. 착각이라기에는 선명했다. 이상하다. 쭈쭈바를 먹느라고 물기 묻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태평이 무의식중에 사람의 정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은 걸을 때 움직임 때문에 머리 높이가 낮아졌다 높아졌다 한다. 그런 움직임이 없이 쭉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둥둥 떠서 오고 있거나 벽에 찰싹 달라붙어 그런 움직임 없이 걷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2m가 넘는 담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모자일까? 길쭉한 모자일지도 몰라.
묘하게 섬찟했다. 점점, 태평은 그것이 머리통이 맞고 걸어오는 것이 아닌 둥둥 떠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쭈쭈바를 입에서 뗐다.
태평이 그것을 정수리라고 확신하고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움직임을 뚝 멈췄다. 태평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바로 직선거리로 맞은편에서.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 하나가 흘렀다. 더위 때문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태평은 눈을 감지도 않고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끼잉거리던 장군이의 숨소리도, 매미의 울음소리도, 선풍기의 탈탈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이 버거워서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담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서 있었다. 태평의 직선거리 바로 맞은편으로, 마치 담을 뚫고 들어온 것처럼.
깜짝 놀란 태평이 앉아 있던 상태로 뒤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얀 어른이었다. 하얀 한복 같은 걸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단발이었고 태평이 예상한 대로 정수리 쪽이 하얬다. 단발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머리가 검은색이었다. 마치 새하얀 머리칼의 끝부분만 먹에 담가 번진 것 같았다. 염색한 것이라기보다는 타고난 것 같았다. 창백하고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는 뙤약볕에도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길쭉했다. 다시 보니 확실히 담장보다는 키가 작았다.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홉뜨고 태평을 보고 있는 길쭉하고 하얗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몸짓이 마치 학 같았다. 길고 새하얀 한복은 비단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태평은 한복은 잘 몰랐으므로 그것이 비싸 보이는 전통 복장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태평아.”
그 새하얀 사람은 태평은 말한 적 없지만,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예쁘게 생겨서 여자 어른인가 했는데 목소리는 낮은 편이라서, 태평은 그의 성별이 헷갈렸다.
태평의 이름을 부른 뒤 그것은 씩 웃었는데, 눈웃음을 지으니 어머니보다도 아름다운 것 같았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어쩐지 사람을 홀릴 것 같은 교태로운 눈웃음에 가까웠다.
낯선 이가 말을 걸면 경계하라고 학교에서 배웠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기에 태평은 순간 그가 낯선 이가 아니라 부모님의 친구이거나 마을 사람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은 시골 마을에 저런 사람은 없었다. 태평은 아주 잠깐 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담장과 연결된 대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들어왔을까? 눈 한 번 깜빡거리는 그 짧은 시간에.
그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눈 한 번 깜빡거리는 그 짧은 시간에, 기척도 없이, 그것은 태평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하얀 한복이 온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역시나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재질이 맞아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너무나도 새하얘서 꺼림직했다.
올려다 봐야 할까? 태평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한여름인데도, 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인지 주위가 서늘했다. 그리고 손바닥마저도 서늘했다. 서늘한 손바닥이 부드럽게, 태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평아.”
그것은 한 번 더 태평의 이름을 불렀다. 상냥하고, 어쩐지 느긋하게, 그러나 높낮이 없이 같은 음조로, 마치 사람 이름이 아니라 어떤 귀한 보물의 이름을 외우듯이. 태평의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더 짙어진다.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없이 다른 모양으로 주름이 잡힌다. 소리 없이 허리를 접은 그것이 태평과 눈을 마주했다.
태평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것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더욱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림에 가까울 정도로 곱게 생겼지만 크게 부릅뜬 눈이며 억지로 웃는 것처럼 접힌 입꼬리가 기괴했다.
“이태평.”
그것이 한 번 더 되뇌였다. 태평은 자신을 부르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째서인지 알겠다는듯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며 씨익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광대뼈가 올라간다.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간다. 붉은 눈화장이 칠해진 눈두덩이가 보인다. 즐겁다는 듯이 가늘게 뜬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태평은 눈을 피했다. 그러자, 마치 한여름의 아지랑이처럼, 혹은 악몽처럼…. 그는 사라졌다. 흔적도 없었고, 소리도 없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
끼잉, 끼잉…. 그 소리에 태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군이가 겁을 먹고 개집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오줌까지 지린 듯했다.
“장군아…. 이제 괜찮아. 나와.”
태평이 불쌍한 개를 한 번 불렀다. 그러자 장군이가 겁먹은 눈빛으로 간신히 집 밖으로 나와 주위를 탐색했다. 아직 오들오들 떠는 것이 이 개는 진돗개나 삽살개 혈통은 아니리라. 태평은 부드러운 손길로 장군이를 쓰다듬었다. 안정되지 못한 개가 낑낑 태평의 가슴과 팔 사이에 주둥이를 묻었다. 장군이는 이름처럼 무서운 아저씨들한테도 기죽지 않고 컹컹 월월 거칠게 짖어댔는데. 그 아름다운 사람이 뭐가 무서워서 장군이는 겁을 먹었던 것일까?
물론 태평도 깜짝 놀랐지만, 어쩌면 태평은 귀신을 본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부터 태평은 이상한 것들을 보았다. 어머니는 헛것이라며 무시하라 했다. 태평은 착한 아이였기에 어머니에게 근심을 한 개 더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매우 슬퍼했으니까. 그래서 이상한 것을 보아도 무시하고 지나갔다. 깜짝 놀라도 티를 내지 않았다. 가끔은 무서웠지만, 꾹 참았다. 그냥 헛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죽은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 주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귀신 같은 것들을 보아도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귀신 중에 어떤 것도 저렇게 선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렇게 똑똑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말을 걸지 않았다. 다가오지도 않았다. 웃는 귀신은 한 번 보았었는데 지독히도 무섭게 생겼다. 저렇게 상냥하고 요염하게 생기지 않았다.
“뭐였을까?”
장군이를 쓰다듬으며 태평이 중얼거렸다. 한 차례 이상한 것이 지나갔는데도 겁을 먹기는커녕 태평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