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에 한 번 있는 일이래요, 천 년에 한 번!”
스키피 브라운이 대신전의 계단을 오르며 조잘거렸다. 이 애는 헐떡거리지도 않나. 다양한 잡일로 다져진 기초체력이 있는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너무 힘들어도 입을 다물 수는 없다거나. 블리스 플레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잠깐만 쉬었다 가자….”
그는 오늘 하루 벌써 다섯 번째로 쉬어 가자고 제안했다. 대신전 근처는 고귀하고 존엄한 공간이므로 어떠한 마법도 배제되었다. 신자들은 대략 사천 개의 계단을 기도하며 오롯이 맨몸으로 올라야 했다. 계단 천 개 마다 먹을 것을 팔거나 쉴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날이 저물기 전에 이 곳에 올라가고 싶었다. 새벽나절부터 계단을 올랐는데 벌써 하늘이 주홍빛이었다.
“안 돼요, 블리스 님!”
스키피가 제자리에서 다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도대체 체력이 어떻게 된 거지? 스키피는 블리스가 가서 쓸 여러 도구들까지 전부 매고 있었다.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매고, 삼천 개의 계단을 올랐는데도 끄떡없는 체력이 조금 부러웠다.
“오늘 안에 오르셔야 해요! 밤이 되면 더 쌀쌀하고 피곤하실 거예요. 딱 천 개 더 남았어요. 삼 천 개 잘 오르셨잖아요. 어라, 천 개. 천 년. 이거 정말 대단한 일 아니에요? 네?”
스키피가 블리스의 한 쪽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리스는 주저앉아 “싫어….” 하고 웅얼거렸다. 눈물 대신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산 위는 추운데도 그랬다. 흑흑. 블리스가 우는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참고 올라가요~ 올라가면 분명 블리스 님을 위해 준비한 멋진 숙소가 있을 거고, 거기엔 편안한 침대도 있을 거고, 따뜻한 물도 받아 놨겠죠. 장미 잎을 띄워서요. 블리스 님은 이제부터 신부가 되실 거니까, 극진한 환대를 받으실 거라구요. 여기 이 계단에 누워 계실 거에요?”
흰 돌로 만든 계단은 아름다웠다. 깨끗했고, 잘 관리된 것이 틀림없었다. 깨진 조각 하나도 없었으니까. 블리스가 뒤를 돌아 밑을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았다. 구름이 근처에 보이는 것 같았다. 블리스가 중얼거렸다.
“응, 계속 계속 여기에 누워 있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스키피….”
스키피가 한숨을 쉬었지만, 블리스는 도통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 하루에 오천 보도 채 걷지 않는 블리스 플레처가 계단 오르기 운동을 하루종일 해야 한다니.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히 지옥의 계단이었다. 이 위에는 사실 명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블리스 플레처와 스키피 브라운은 산 중턱까지 탈 것을 탔다. 하지만 신전의 영역인 계단은 이렇게 직접 걸어가야 했다.
“아이 참, 블리스 님~ 빨리요, 빨리! 저는 이렇게 무거운 짐도 잔뜩 들고 있잖아요!”
스키피가 툴툴대며 블리스를 다시금 일으켜세웠다. 블리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스키피에게 기대 일어섰다. 스키피 말이 맞았다. 스키피의 짐이 저렇게 널뛰기 된 이유는 블리스의 짐 때문이었다. 부피가 큰 바이올린이며, 악보대, 악보들, 옷들까지. 다른 필수적인 것들은 계단 아래에서 짐만 따로 옮기는 도르레 형식의 운송차가 가지고 올라갔다. 하지만 바이올린처럼 소중한 것은 블리스가 꼭 안고 가고 싶었다. 이천 번째 계단에서 실신해 넘어질 뻔한 뒤로 스키피의 짐에 들어갔지만 말이다.
‘스키피는 나보다 작은데 어쩜 이렇게 체력이 좋지? 베다국인들은 뭔가 다른 게 틀림없어….’
(*베다국:스키피의 고향)
차라리 운송차. 사람도 그것을 타면 좋을텐데. 도르레의 원리를 적용한 운송차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짐을 옮기는 광경은 처음 보면 마법 같기도 했다.
‘어쩌면 다음부터는 탈 수 있겠지, 하지만….’
대신전의 첫 방문시에는 꼭 이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요즘은 많이들 봐준다고 하지만, 블리스는 그 수칙을 꼭 지켜야 하는 신자였다. 그가 방문하게 된 목적은 다름아닌―
“그러니까 블리스 님,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래요! 이렇게 세 명의 신수님의 탄생이 겹친 건 말이에요.”
스키피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입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사실, 스키피의 주절거림을 듣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다리를 기계적으로 움직일 때 도움이 됐다.
“신수님들은 인간보다 두 배에서 네 배는 오래 사시고. 그래서 지금 살아 계신 신수님들이 열 몇명은 되시지만 그래도 이렇게 세 명이나 탄생이 비슷하게 겹치는 건 정말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래요. 아니, 저는 삼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블리스 님. 세상에, 블리스 님이 신수 님의 신부가 되시다니~! 이건 정말 영광이에요. 블리스 님을 모시던 저, 스키피 브라운도 이렇게 대신전에 가게 되었잖아요! 우와! 이제 한동안 거기서 살겠죠! 우와~!”
스키피가 펄펄 뛰며 단숨에 몇 계단이나 올랐다. 블리스도 헥헥거리며 따라갔다. 그 결과, 정말 고지가 눈에 보였다. 조금만 더 오르면 도착이었다! 만세! 태양은 거의 사라져 하늘의 윗부분이 남색이 되어가는 찰나였다.
“이제 더 이상 못 움직여…!”
블리스가 막 올라와 기어코 쓰러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희고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하얀 기둥들은 두꺼웠고 섬세한 조각들과 웅장한 자태가 도무지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신수들이 지었을 테니 사람이 만든 건 아니었다.)
대륙의 한가운데. 배꼽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이 올림푸스 산은 디에우스 프테르 교의 총본산이었다. 산의 맨 꼭대기에는 하늘과 소통하기 위한 대신전이 있다. 블리스가 도착한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
…하지만 신부고 나발이고 지금은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가녀린 블리스 도련님!”
스키피가 발을 동동 구르며 블리스의 왼 팔을 잡고 낑낑거리며 끌고 갔다. 그러나 스키피 또한 블리스를 유의미하게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다.
“…도와드릴까요?”
대륙공통어, 하지만 동대륙 어조. 상냥한 말투가 들리기에 블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긴 연분홍색 장발을 가진 동대륙인 사내였다. 그는 동대륙 전통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의 재질이 고급스러웠고, 달려 있는 장신구도 비싸 보였다. (블리스는 서쪽 사람이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돈이 많은 신자이거나 귀족, 왕족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그와 같은 신부 후보일수도 있었다. 서대륙에서는 드물지만 동대륙인들은 사내도 머리카락을 귀중히 여겨 기른다 하더니 블리스보다도 머리카락이 길어 보였다.
아무튼간에, 전반적으로 친절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손을 내밀자, 스키피가 반색했다.
“그럼 당연히 환영이죠!”
사내와 스키피는 블리스의 팔을 한 짝씩 잡고 들어올렸다. 블리스는 ‘짐짝처럼 질질 끌려 가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음악 학교에서 신입생 기념으로 술을 잔뜩 퍼마셔 기절했을 때 빼곤 이렇게 옮겨진 적이 없었는데….’
조금 비참한 꼴이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게 옮겨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으므로 블리스는 몸에 힘을 뺐다. 근육들의 비명이 잠시 멈췄다.
얼마 옮겨지지 않아 신전 본당이 나왔다. 신전 구경이나 좀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정신은 없었다.
“아휴, 너무 무리를 하신 게 틀림 없어요. 가시면 어떻게, 쉬게 해드릴 수 없을까요?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는데!”
스키피가 걱정을 조잘댔다. 동대륙인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룻밤 쉬면 조금 괜찮을 거에요.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다행이죠. 이런 가녀린 몸으로 사천 개의 계단을 오르시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가녀린 몸? 블리스는 흘끗 사내를 보았다. 피곤에 반쯤 감긴 눈으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사내나 자신이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조금 자존심에 상처가 났을지도 모른다. 블리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땅을 딛고 선다.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일어서서 걸을게요….”
“아, 이제 좀 괜찮으신가 보군요. 다행이네요. 안아 들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남자가 말을 골랐다.
“…짐짝처럼 옮겨 드려서 마음이 좋지 않았거든요. 저도 힘이 장사였다면 들어 올려들었을 텐데.”
“아니에요. 이만큼이나 옮겨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어차피 조금만 더 가면 숙소일 테지요…?”
사내는 잠깐 눈을 피했다.
“일단 대신전 본당에 가서 인사를 하고 온 것을 알린 다음 숙소에 가게 될 것 같아, 신관님들을 보러 가고 있었는데요. 아, 시종은 바로 숙소로 보내는 게 좋겠군요.”
그러더니 흘긋 턱짓으로 정반대를 가리켰다.
“저쪽이 숙소란다. 짐이 대단한데. 멋지게 들고 올라왔구나. 수고했으니 먼저 가 있으렴, 네 주인은 내가 보필해 모셔 드릴 테니.”
“…네!”
스키피는 이 친절하고 어른스러운 사내의 말에 단숨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주인인데! 하지만 블리스 또한 그가 어딘가의 불한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고개를 끄덕여 스키피를 보냈다.
스키피가 가자 그는 살짝 앞에서 앞장 서 걸었다. 블리스도 뒤따라갔다.
“걱정이나 의심은 안 해도 됩니다. 신관님들을 먼저 뵈어야 한다는 건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까요. 바로 하루 전에요.”
“…그렇다면 역시 당신은…?”
“예, 당신도 제 예상이 맞겠지요?”
사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서대륙인이 껄끄러워진 것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사내 된 몸으로 ‘그 단어'를 꺼내며 서로를 묶어 지칭해야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블리스가 대답했다.
“네. 제가 신부입니다. 당신도 신부시군요.”
사내가 어쩐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