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제 오후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저도 저 사천 개의 계단을 올랐네요.”
하하. 사내가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블리스가 물었다.
“어떻게… 오르고도…. 멀쩡하신가요?”
“어제는 저도 정말 기진맥진이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서 신전에서 준비해준 저녁도 겨우 먹었으니까요.”
블리스는 자기도 밥을 먹을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시 블리스를 천천히 이끌며 말했다.
“아, 제 설명을 안 했군요. 저는 무위 만한*에서 온, 모란 의현이라고 합니다. 청명**에서 이곳까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가도 한 달은 족히 걸리더군요. 신부가 되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 일 년은 고민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인생은 뭐든 갑작스러운가 봐요.”
*무위 만한 : 동대륙의 패국 한나라의 공식 명칭
**청명: 한나라의 수도
모란 의현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블리스는 저 먼 동대륙의 사정 따위 몰랐다. 무위 만한이라는 나라는 알았지만, 사내의 이름은 생소했고 지명 또한 처음 들었다. 책을 읽긴 했지만, 대부분이 소설책이었지 지리에 관련된 책은 거의 없었다. 블리스는 왕족의 피가 섞인 귀족이었으므로, 의현 또한 왕족이거나 귀족일 것이다. 신수의 신부는 그 핏줄에서 나오는 것이 원칙이었다. 신수가 태어나기 전, 대신전에서 파장이 맞는 신부를 찾아 불렀다. 신탁으로 내려오는 것이라 바꿀 수도 없는, 무거운 운명의 예언. 신수의 신부는 필수적이었다. 거부한다면 억지로 끌려올 뿐이다. 나라와 세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이곳에서 신수가 성장할 때까지… 최소 삼 년, 길면 오 년은 머물러야 한다더군요.”
의현은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 또한 무언가를 포기하고 왔을지도 모른다. 블리스도 포기한 것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만큼 지킨 것들도 많았다. 그래서 블리스는 투덜거리지도 후회하지도 않기로 다짐했었다. 애초에 그가 거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의현이라는 사내도 그럴지도 몰랐다.
“저도… 삼 년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형들은 제게 신전에서 신수님을 돌보며 휴양하는 셈 치라고 하더라고요.”
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리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블리스가 몸이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약할 것 같고, 휴양이 필요할 것 같기도 헀다. 막내 같은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막내였던 모양이라고 의현은 생각했다. (그 또한 이복동생들이 여럿 있었다.)
“삼 년 간 그래도 제가 연주하는 바이올린도 들고 왔으니, 아예 연주 실력이나 잔뜩 키워가려고요. 기회라고 생각할 거예요. 형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저희 나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요… .”
블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후회는 없었지만, 두려움은 있었다.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자신을 달랬다.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사랑도, 걱정도 참 많이 받았다. 부모님과 형제에게 명예로운 일이라 생각하면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군요. 저도 뭔가 할 거리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 서적이나 쓸까?”
사내가 가벼운 어투로 대답하고는 멈추어 섰다. 신관들이 나와 있었다. 도착이었다. 그중에서 특히나 화려하게 눈에 띄는 자주색 옷을 입고 있는 자가 있었다. 블리스는 그자가 대신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신부님까지 늦지 않게 오셨군요.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대신관은 곧 교황이라 불렸다. 교황은 생각 외로 젊었다. 나이 든 노인을 생각했는데, 사십 살 정도 된 것 같은 중년이었다. 순한 인상이지만 어쩐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교황은 젊었을 적 수도사로, 성기사로 여러 전쟁에 파견된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블리스는 꾸벅 인사했다.
“블리스 플레처 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황은 상냥하게 웃으며 블리스의 손을 잡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블리스의 얼굴을 훑듯이 쳐다봤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초상화와 얼굴이 같은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손은… 아마도 신탁에 나온 ‘신부’가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지만 노련한 교황은 손을 잡는 것을 확인 과정이 아닌 친애의 표시로 비추게 할 정도였다. 교황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계단이 참 많았지요? 한 번 시련을 거쳤으니 앞으로는 운송차를 타고 다니셔도 됩니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타고 내려가도 되나요? 저는 신수님이 클 때까지, 이곳에서만 머무는 줄 알았어요.”
“그럼요, 이 산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내려가시는 것은 허락됩니다. 신수님들도 활력이 넘쳐서 얼마나 많이들 돌아다니시는지요. 아마 자주 타게 되실 겁니다. 산 아래는 관광지처럼 되어 있지요? 급히 오시느라 관광하지 못하셨을 테니, 나중에 신수님과 함께 느긋하게 관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답니다.”
교황이 자비롭게 웃었다.
“제가 신수님들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이 이번이 세 번째군요. 교황으로서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세 분이나 탄생하시니, 이 또한 신께서 내려주신 경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블리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짐은 전부 방에 두었습니다. 블리스 님의 방을 안내해드릴 테니, 오늘은 여독을 푸실 겸 푹 쉬세요. 저녁은 방으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내일 일은 안내해주는 사제가 말씀드릴 겁니다.”
교황이 턱짓하자, 교황 뒤 편에 서 있던 신관 중 한 사람이 나와 블리스 옆에 섰다. 후드를 푹 눌러쓴 신관은 아마도 블리스와 키가 비슷하고 어깨도 넓어 남자 같았다. 하지만 성별을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후드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갑습니다, 블리스 님. 블리스 님을 안내할 아슈레입니다.”
목소리가 낮았다. 사내인 모양이다.
“수행의 일종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자, 이쪽으로….”
수행이란 말에 블리스가 살짝 주위를 훑었다. 그의 왕국은 세 명의 신수를 모시고 있었고 주로 태양과 예술의 신, 천공의 신, 달의 신 등을 모셨다. 천공의 신을 모시는 대신관들의 옷은 익숙했지만, 이렇게 후드로 얼굴을 다 가리는 이들은 흔히 보지 못했다.
보아하니 몇몇 다른 신관들도 긴 후드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간간이 후드로 눈을 가린 신관들도 있었다. 아예 눈 빼고 얼굴을 전부 가린 채로, 침묵을 유지하는 신관들도 있었는데, 아슈레는 그들은 침묵의 수행자들이라고 했다.
“저들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슈레의 뒤를 따라가니, 금세 숙소에 도착했다.
“신부님과 신수님들의 숙소가 가장 안쪽에 있습니다. 함부로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기 위함입니다.”
신관들의 숙소 건물 더 안쪽에 신부와 신수가 머무르는 공간이 있었다. 다리가 조금 아프지만, 블리스는 잘 따라갔다. 가서 쉴 생각에 힘이 난 것도 있었다.
마침내 마주한 삼 층 짜리 건물은 거대하고 호화로운 옛 양식이었다. 뒤로는 작은 숲이나 정원들이 있었다. 산 위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거대한 산이니까 배꼽이라 불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숲 뒤로는 절벽입니다. 이곳이 꼭대기니까요. 조심해야 합니다.”
아슈레가 설명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자, 숙소는 넓고 호화로운 저택에 가까워 보였다. 층고가 높고 기둥도 두꺼운 신전 같기도 하고. 어쨌든 서 대륙에서도, 동대륙에서도 볼 수 없는 양식이었다. 모든 것이 흰 돌로 잘 마감되어 있었는데 역시 사람이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생활감도 없었다.
“이곳에 신부님들이 한 번에 세 분이나 머무는 것은 드문 일이라더군요. 마지막으로 머문 신부님이 삼십 년 전이시니… 저희가 열심히 청소했지만 아마 먼지가 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괜찮아요. 앞으로 세 명, 아니 여섯 명…? 이나 머무르면 더 정신없어질 테니까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리스 님. 짐은 방으로 옮겨 두었습니다. 블리스 님의 시종인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 저녁은 곧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블리스는 삼 층의 제 방으로 도착했다. 일 층에는 식당과 넓은 홀, 여러 방이 있었다. 이 층과 삼 층에는 숙소들이 있었는데 아슈레의 설명에 따르면 블리스가 삼 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말 짐들이 있었다.
“아, 블리스 님~!”
그의 충실한 시종 스키피 브라운도 있었다. 짐을 풀고 있던 스키피가 총총총 달려왔다.
“오셨군요! 무슨 말씀 들으셨어요?”
“아냐. 별말 없었어. 환영한다구….”
“에잉, 신부 님들이 오시면 성대한 환영식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숙소에 데려다 놓고 밥 주고 땡인가? 아, 그래도 이 스키피 브라운이 물어물어 욕실에 따뜻한 물을 받고 있어요! 신수님들이 만든 곳이라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도 시설도 있고 좋네요! 장미꽃은 못 올렸지만요, 일단 씻으세요, 블리스 님! 제가 저녁 받아 둘게요!”
스키피가 조잘거리며 블리스의 등을 욕실 쪽으로 떠밀었다.
“또 언제 물까지 받아 놨어? 대단하구나, 스키피. 고마워. 근데 저녁을 갖다주시며 신관님이 내일 일정을 알려준다고 하셨는데….”
“칭찬은 스키피를 춤추게 한다! 그거야 욕실에서 들으시면 되죠! 옛 르타고 제국인***처럼!”
***르타고 제국: 고대에 서 대륙을 통일했던 제국, 다른 나라 국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호화스럽고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멸망했다.
결국 스키피의 성화에 블리스는 옷을 벗고 따뜻한 물로 가득 찬 욕조로 들어갔다. 이건 성수일까? 대신전의 모든 물은 성수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블리스는 지금 굉장히 호화로운 대접을 받는 셈이었다.
일단 물 안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다. 노곤함이 몰려온다. 비명 지르던 근육들이 안도하는 것 같았다.
“스키피… 정말 최고야….”
블리스가 중얼거렸다. 십 분쯤 지났을까? 밖에서 아슈레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블리스 님, 저녁 식사는 테이블 위에 두겠습니다.”
“블리스 님은 씻고 계셔요! 거기 두시고 문밖에서 말씀하시면 될 거예요!”
“예. 블리스 님. 내일 일정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9시까지 신전의 기도실로 오시면 됩니다. 그날 신수님께서 깨어나실 겁니다. 저는 이만 가 볼 테니, 모쪼록 편히 주무십시오.”
욕실로 깍듯한 아슈레의 목소리가 울렸다. 블리스는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며 “네….” 라거나, “알겠어요….” 라고 말했다. 본인이 속삭이듯 말했다는 자각이 없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아슈레가 들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고개가 꾸벅꾸벅 흔들렸다.
잠들랑 말랑 하는 의식 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천공의 신도, 달의 신도, 태양의 신도 아닌 명계의 왕… 블리스의 핏줄에 흐르는 북쪽 왕족의 혈통이 그를 이곳에 불렀다. 일단 블리스는 브리타니아**** 왕국 출신이었기에 명계의 왕이 될 신수의 신부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브리타니아 연왕국 : 서 대륙의 끝, 섬과 붙어 있는 섬-항구 왕국. 블리스의 고향. 천공의 신, 태양의 신, 달의 신을 믿는다.
추운 북쪽 지방을, 겨울을, 죽음을, 지옥을 다스린다고 알려진 명계의 신수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의 나라의 신수는 아름다운 그리핀이었다. 정의와 용기를 다스리고, 하늘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일벌백계하는, 번개를 다루는 멋있는 신수. 블리스도 만약 신부가 된다면 그런 신수의 신부가 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계의 신수라니…. 어쩌면… 조금 무서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명계의 신수는 거대한 검은 뱀이었고 사람을 삼키다가 악한 존재로 여겨져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죽지 않고 계속 계속 길어져서 자기 꼬리를 물 정도라거나. 어떤 동화에선 검은 늑대였다. 검은 늑대가 집 앞에서 울면 사람이 죽었다고 헀다. 어떤 동화에선 거대한 흑룡이었다. 죄인들을 한입에 삼키며 꺼지지 않는 검은 불을 내뿜었다고 했다.
동화 속 내용들이 의식 속에서 멀어져 갔다. 블리스는 머리가 세 개인 검은 개들에게 쫓기다가, 자신을 신수라고 주장하는 시체 같은 초록색 피부의 남자에게 붙들렸다가, 자칼의 머리를 한 명계의 주인에게 먹힐 뻔했다가, 검은 뱀에게 묶였다가… 그리고…
검은 흑표범 한 마리가 지켜준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