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리스 님!”
“응… 조금만 더 잘게요….”
“…참, 블리스 님!!”
스키피의 목소리에 블리스가 번쩍 눈을 떴다. 스키피가 블리스의 몸을 마구마구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버릇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분명 스키피는 블리스가 늦잠을 자고 있어서 깨운 것일 테니까!
“헉, 스키피! 지금 몇 시니?”
벌떡 일어난 블리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평상시에는, “응… 스키피… 조금만 더 잘래….” 하고 밍기적대다가, “스키피… 지금 몇 시야…?” 하고 나른하게 물었을 텐데. 어차피 본가에는 블리스가 느긋하고 여유롭게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첫째 형은 가끔 조금 꾸짖었지만)
하지만 이곳은 신성한 대신전이었고, 그는 신부 후보였고, 무엇보다 9시까지 가야 했다!
“지금 8시에요! 7시부터 깨웠는데, 블리스 님이 도무지 일어나질 않으셔서….”
스키피가 조금 울상인 표정을 지었다. 블리스가 다급하게 일어났다. 그는 고질적인 저혈압이 있어 아침에 약했지만, 지금은 초인적으로 움직였다. 근육통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도실에서 온갖 신관들이 다 모일 거고, 다른 신부 후보도 만날 거고, (한 명은 어제 만났지만) 그리고 오늘 신수님도 만날 텐데 이런 모습으로 갈 순 없어!
다행스럽게도 어젯밤, (스키피의 주장에 따르면) 블리스 플레처는 알아서 잘 씻고 밥도 조금 먹고 잠든 모양이었다.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어젯밤 뽀득뽀득 씻었다고 해서 아침 단장을 할 필요가 없단 소리는 아니었다. 일단 세수하고, 블리스는 짐 속에 들어 있던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정돈했다. 스키피도 도와주었다. 더러운 것이 없나 손수건을 들고 확인하고, 눈을 깜빡인다. 그래, 이제 나름 어디 나갈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벌써 삼십 분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블리스가 허둥지둥 나갈 준비를 했다. 문간까지 뛰어갔다가 블리스가 멈췄다.
“블리스 님, 빨리요~!”
“잠깐만!”
가방 속을 뒤져 신수 님을 처음 만나면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을 챙기는 것도 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또 십 분이 흐르고, 블리스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실까지 뛰어가야만 했다. 스키피가 옆에서 블리스의 힘이 빠지지 않게 계속 응원하며 같이 뛰었다.
왜 이렇게 넓은 거야!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블리스 자신의 약한 체력도 한몫했지만, 블리스는 자신이 성인 남성이라는 것을 복기하며 열심히 뛰었다.
신관 숙소를 지나 대신전 본당의 기도실까지.
“흐엑, 헥…. 안, 안 늦었, 지, 스키피?”
물으며 블리스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안 늦었어요! 블리스 님, 얼른 들어가세요! 이 스키피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게요!”
블리스도 확인했다. 9시 1분 전이었다.
후다닥 들어간 블리스는 기도실 내부의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왜인지 소란을 피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삼십 명은 될 것 같은 신관들이 모여 있었다. 블리스는 천천히 살금살금 앞으로 걸어갔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신관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가운데 일직선으로 길이 났다. 그들의 시선이 블리스에게로 꽂혔다.
‘부, 부담스러워….’
바이올린 연주에 몰입하면 이런 시선에도 거뜬한데. 그렇지 않을 때 이런 시선을 받으면 블리스는 조금 주눅이 드는 편이었다. 블리스가 슬쩍 눈치를 보며 천천히 가운데로 걸어갔다. 기도실에는 의자가 없었다. 아마도 평상시 다들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앉아서 명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거의 아무것도 없는 홀과 같았는데, 신관들이 둘러싸고 있던 가운데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어제 봤던 다른 신부 후보도 있었다. 블리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의현에게 인사했다. 블리스를 본 의현이 마찬가지로 머리를 까딱이며 반겼다. 그 또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반묶음으로 차분하게 묶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검은 머리를 한, 다른 남자도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얼핏 보면 서대륙인 같았다. 서대륙인들처럼 머리가 짧고,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식도 서대륙인에 가까웠다. 특히 아직 안경을 쓰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동대륙인이었다. 상냥하게 생긴 의현과 달리 그는 조금 차가운 인상이었다. 블리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깐 블리스를 관찰하더니, 이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아래?
블리스도 자연스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바닥엔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손잡이가 달린 바구니가 있었다. 간간이 금빛 나뭇가지가 섞여 있는 바구니는 예사로운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바구니에는 천이 깔려 있었는데, 푹신할 정도로 두툼했다. 그런 바구니가 세 개 있었다. 그리고 바구니마다, 푹신한 천 위에… 아주 포근하게… 알이 올려져 있었다.
블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수의 탄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여러 신수는 각기 고유한 탄생 이야기가 있었다. 동물의 태를 빌려서 태어났다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거나, 하늘에서 내려 주었다거나 나무구멍에 있었다거나…. 생각해 보면, 알에서 태어나는 것도 그중에 하나였다.
“신수님들은 알에서 태어나십니다.”
교황이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작게 감탄사를 내뱉은 블리스가 천천히 알들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바구니에 들어 있는 알은 매끈하고, 동그랬다. 겉면은 진주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조개껍데기의 안쪽 같기도 했다. 빛이 비칠 때마다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렸고, 알이 딱딱하다기보다는 말랑해 보였다. 만지면 축축할 것 같다고나 할까. 알에는 하늘색 얼룩무늬가 있었는데, 검은색이었다면 젖소 무늬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늘색 무늬도 반짝거리며 빛났다. 크기도 거위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 이런 것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본다면 보석과 조개껍데기로 만든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생각하고 갖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두 번째 바구니에 들어 있는 알은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두 알보다 거대했다. 다른 알들은 바구니가 널널했는데, 이 알만 바구니가 꽉 차게 거대했다. 풋볼*에 쓰이는 공 정도 크기는 되는 것 같았다. 흰 알에 마찬가지로 갈색 줄무늬가 나 있었는데, 마치 동대륙에 서식한다는 호랑이의 줄무늬 같았다. 그리고 알껍데기가 상당히 두꺼워 보인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풋볼 : 브리타니아 연 왕국에서 하는 공놀이. 공은 돼지 오줌보로 만든다. 블리스가 졸업한 명문 귀족 남학교에서는 필드 게임이라고 불리며 남학생들의 즐길 거리였다. (블리스는 잘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바구니. 세 번째 바구니에 들어 있는 알은 칠흑색이었다. 마치 밤의 어둠처럼.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알에 빛이 비치면, 간간이 검붉은색으로 보였다. 알의 겉면은 껍질이 아닌 비늘 같은 것으로 감싸져 있었다. 검은색 비늘이 돋아 있는 알은 끌어안거나 품는다면 따가울 것 같았다. 알의 크기는 첫 번째 바구니의 알보다는 컸지만, 두 번째 바구니의 알보다는 작았다. 아름다운 첫 번째 알과 거대한 장난감 같은 두 번째 알과 달리, 세 번째 알 또한 조각된 장식품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딘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알이 어떤 신부님에게 갈지 궁금하시겠지요.”
블리스가 관찰을 끝내자마자 교황이 말했다. 다른 신부들도 교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알은 바다의 왕이 될 신수님이 태어나실 겁니다. 현수 님, 당신의 알입니다.”
현수, 그게 검은 머리 남자의 이름인 듯했다. 남자는 어쩐지 탐탁잖은 표정이었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초연한 듯 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을 받아들였다. 바구니의 손잡이를 잡고 그는 천천히 제 가슴 높이로 바구니를 들어 올려 알을 관찰했다. (그럴 만큼 아름다운 알이었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깨지지는 않겠죠?”
남자가 물었다. 한 번쯤 누군가 품었을 법한 의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신관들도 조금 웅성거렸다.
‘그러게 정말 깨지면 어떡하지….’
‘깨지지 않게 조심히 다루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탄생하시는 거 아니야?’
‘아냐, 예언이 오늘이랬어….’
속닥거리는 정도의 말소리였지만 블리스는 예민한 청력으로 빠르게 잡아냈다. 그러니까 내가 저 알을 받는다고 당장 태어나시는 게 아니라고?
“쉿!”
교황이 신관들의 웅성거림을 재지하고 현수에게 대답했다.
“깨지진 않습니다. 의외로 단단하니까요. 하지만 깨진다면… 그것도 운명이겠지요.”
그리고 바로 다음 알을 다음 신부에게 안겼다.
“두 번째 알은 산천 지대의 왕이 될 신수님이 태어나실 겁니다. 의현 님, 당신의 알입니다.”
정말 호랑이라도 태어나는 걸까? 의현이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훅, 자리에 앉았다. 앉고 나서 바구니를 끌어안은 의현이 교황을 올려다보았다.
“아하하… 뭔가… 곧 태어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안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블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의현이 앉은 상태로 소중하게 바구니를 끌어안은 모습을, 현수가 조금 신기한 것을 보듯이 쳐다봤다. 그는 어정쩡하게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자세였다. 블리스도 신기하게 보긴 마찬가지였다. 알을 처음 봤는데도 신부로서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것일까? 그런 운명이 정말 있다고?
교황은 딱히 의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블리스를 쳐다봤다.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였지만, 블리스는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저 검은 알이 내 알이구나. 뾰족뾰족하고, 어둠을 두르고 있는 것 같은 알. 다른 알들과 다르게 그건 바닥에 떨어트려도 깨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흠집을 내겠지. 블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내… 신수 님. 신랑.’
바구니는 묵직했다. 양손으로 들어야 했다. 이 알 속에 뭐가 들었길래?
“세 번째 알은 북부와 명계의 왕이 될 신수님이 태어나실 겁니다. 블리스 님, 당신의 알입니다.”
블리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시 알을 보았다. 알은 미동도 없었다. 정말 오늘 깨어나는 것이 맞을까? 불안함에 블리스도 어딘가 앉고 싶었지만, 이 기도실에는 의자도 뭣도 없으니….
에잇. 블리스 또한 의현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구니를 끌어안지는 않았다. 그저 바구니를 앞에 두고 무릎을 모아 쭈그리고 앉아 바구니를 계속 바라보았다.
교황이 말했다.
“신수 님이 태어날 때까지, 오늘은 종일 여기에 계시면 됩니다. 아마도… 다들 오늘 깨어나실 테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디를 가시건 항상 알과 함께 가 주세요. 신부가 옆에 있어야 신수 님들이 금방 태어나고, 태어나서도 안정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서 있던 현수가 물었다.
“…알에서 깨어난 신수, 님이 제가 신부인지 어떻게 알죠?”
교황이 빙긋 미소 지었다.
“본능적으로 아실 겁니다. 자기 신부를 향한 놀라운 집념이 있으니까요. 신수와 신부는 한 몸입니다. 일심동체인 부부죠. 일단 깨어나면, 여러분도 무슨 소린지 아실 겁니다.”
그러나 현수는 여전히 꺼림직한 듯했다. 알 자체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마침내 현수도 앉아서 바구니를 제 바로 앞에 두고 알을 만져보았다. 신관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가 이내 몇 명은 밖으로 나가고, 몇 명은 제 할 일을 위해 나갔다. 소수만 남아 신부들을 관찰하고 감시했다.
블리스는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알을 바라보았다. 알은 미동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