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차가워진다. 앨런은 잘 빠져나갔을까?
나는 오늘 앨런을 상처입혔다. 어쩌면 아주 아프게.
나와 앨런이 이계의 저주를 받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확히는, 나. 유진 제라드를.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계는 유진을 사랑했다. 그들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의 어떤 점이 그들에게 먹음직스러워보였는지는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정전기가 잘 일어나는 체질이니까 유진의 몸에 흐르는 생체 전류라도 탐이 났을지 모르지.
길을 걷다 마주한 작은 골목길, 어머니와 아버지와 누이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그는 '보았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 보여준 것에 가까웠다.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내딛었을 때, 잘못된 곳에 이끌렸다는 기분, 평생동안 그런 불쾌한 기분에 시달렸다. 가족들이, 소중한 사람들이 그를 이 세계에 붙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진은 그 세계로 향했을 것이다. 사실, 유진 또한 이계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느꼈다. 어쩌면 저 곳이 그가 본래 태어났어야 하는 곳이 아닐까? 그는 원래 저 곳에 귀속되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가슴 속 한가운데가 울렁거린다. 그는 잘못된 곳에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울며 그를 붙잡고 있다.
“어디 갔었니, 유진…….”
놀이공원에서 미아가 된 지 43시간만에, 유진은 화장실 한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유진의 머리카락은 모두 먹혔다. 이계에 대신 두고 온 제물이었다. 이 사건은 부잣집 아이 유괴 미수 사건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유진도, 가족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계로 끌려갔다 온 것이었다. 엉엉 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비통한 표정 속에서 유진은 다시는 이계로 가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이계에 머물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끊임없이.
이계는 그를 끌어들였다.
어느 날은 학교의 미술실. 어느 날은 비상계단. 어느 날은 주차장. 어느 날은 화장실. 어느 날은 박물관의 전시장. 끊임없이… 끊임없이. 한 번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유진은 오랜 기간 그곳을 헤매었다. 어떤 공간에 발을 내딛을 때, 관찰하고 신중하게 들어가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어느 날, 유진은 박물관에서 끌려들어갔다. 기묘한 전시회장에 발을 들이고 한참을 관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진은 숨이 막혔다. 그러나 유진 말고도 한 사람 더 이계에 끌려와 있었다. 그것이 앨런이었다. 앨런은 연구원이라고 했다. 그는 다른 연구진들과의 합의 하에 자신이 들어왔다고 했으며, 이계에 끌려들어가는 체질은 아니지만, 빠져나오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했다.
그런 곳이 있었다니. 진작 알았다면 유진도 어쩌면 도와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유진은 앨런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이런 유약해보이는 사내가 기괴한 것이 득시글거리는 이계를 제대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걱정했다. 징그러운 것을 보면 창백해지는 얼굴에 그저 샌님이겠거니, 싶어져서. 하지만 기우였다. 앨런은 조사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고, 빠르게 나가는 법을 알았다.
그러니까 유진은, 앨런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 더욱 빨리 이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괴물들을 만나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계의 존재들은 유진을 데리고 도망치는 앨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추측건데 나가는 길을 알려 주니까. 그렇기에 호감을 느꼈다. 그를 구해준 앨런에게.
그러므로 제대로 된 결말이라면 앨런이 그를 위해 희생해야 마땅할 것이다. 끔찍한 이계로 제 발로 걸어들어갈 이는 없을 테니까.
그러게, 왜일까? 유진은 왜 앨런을 위해서 희생했던 것일까.
몇 개월 전 이계에 끌려갔을 때, 유진은 기꺼이 앨런에게 거짓말을 했다. 앨런은 거짓말을 싫어했다. 이계 탐사에 자주 끌려다닌 탓인지 원래부터인지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의 거짓말에는 학을 뗄 것이다. 유진은 그 때와 지금 말고는 앨런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때의 탈출은 도박이었다. 어쩌면 같이 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앨런 혼자 나갈 수 있도록… 유진은 앨런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이계에서도 행운이 따르는, 이계가 사랑하는 존재인 유진은 내기에서 승리했다. 카지노의 참가자들은 그를 아쉬운 얼굴로 쳐다봤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정정당당 행운으로 승리한 유진. 다른 사람들의 부정을 밝혀낸 유진.
앨런에게는 힌트를 발견한 것 같다며, 시간을 끌고 있을테니 조사를 해 달라고 비상계단으로 보냈다. 어쩌면 앨런이 힘을 내면 탈출할 수도 있는 루트로.
그러니까 그건 도박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앨런만을 내보내기 위한 도박. 유진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 다 탈출할 순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남아서 카지노의 칩이 되었을 것이다. 유진은 아직 남아 있는 제 심장과, 신장과, 폐와, 뇌와, 안구와, 혀를 기뜩하게 여겼다. 어쩌면 산 채로 차원입방체와 같은 존재가 되어 내장과 뇌가 연결되어 끔찍한 오브제가 된 다음, 내기의 제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결말을, 연구소의 서류 뿐만 아니라 직접 보기까지 했던 앨런은, 유진에게 크게 화를 냈었다. 그가 앨런이었어도 화가 났을 것이다. 단순히 손톱, 손가락 하나를 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공예품이 되어버린 도박중독자 인간들의 결말을, 앨런은 무서워했으니까.
“그 백화점 사장은 정말 멍청했어요, 제가 이길 수 있다고 당연히 믿고 있었어요, 앨런, 앨런은 내가 질 것 같았나요?”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행운이 좋았어도, 괴이들에게 말려들고 지는 것이 당연한 세계야. 넌, 넌… 넌 질 수도 있었어.”
앨런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버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은 앨런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을 알았다. 슬퍼하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애교를 부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앨런을 끌어안고, 몸을 비비며, “내가 당신을 두고 질 리가 없잖아요. 앨런, 화 풀어요.” 하지만 다시 그럴 일 없다고 말하지는 않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귀여워해 달라는 듯 굴면 우위에 서는 걸 좋아하는 앨런이 금방 용서해주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뭐든지 애교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내가 항상 그런 거에 넘어가는 줄 알아?”
하지만 앨런은 유진을 뿌리쳤다. 성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들었던 앨런의 목소리 중에 가장 큰 목소리였다.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저 연구원과 일반인의 관계에 지나지 않았는데 앨런은 언제부터 유진을 이렇게 걱정하게 되었을까? 애인이 되었을 때부터?
유진의 도박에 화를 내는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너는……. 내가 널 걱정하는 게 아무렇지 않아? 한 순간의 실수로 널 잃을까 봐, 얼마나 걱정되었는데. 걱정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지 마. 말했잖아,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널 희생하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아니면 죄책감을 이쪽에 떠넘기려는 건가?”
앨런이 유진을 단단히 노려보았다. 평상시처럼 삐진 수준이 아니었다. 투정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유진이 그를 속이고 그만 살게 했다는 것 때문에. 분함인지 서운함인지 맺혀 있던 눈물이 흘렀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던 앨런이 입술을 깨물었다.
“앨런, 그런게 아니라…”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유진은 지금까지 자신의 애교로 무마되지 않는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그가 잘못한 게 맞았다. 앨런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면서, 목숨을 건 도박을 했던 것이다. 앨런을 믿지도 못했다. 앨런에게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네가 어리다는 사실을 내가 잊고 있었던 모양이야. 네가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넌 이계의 무서움을 모르고 치기어린 행동을 해대고 있었던 거였어.”
쩔쩔매는 유진을 바라보던 앨런의 표정은 점점 풀렸다. 어쩌면 그가 어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풀렸다기보다는 아무 표정도 띄우지 않았다.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그저 무표정. 그러더니 앨런은 몸을 돌렸다. 이때만큼은 유진은 앨런의 능력이 탐이 났다. 그도 앨런의 손을 잡고 앨런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할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앨런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유진은 열심히 뒤따라갔다.
“미안해요, 앨런,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앨런, 앨런!”
앨런은 잡혀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앨런은 유진을 믿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구원인 앨런보다는 언제나 이계의 유혹을 받는 유진이 희생하는 편이 훨 낫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까지 꺼내면 앨런은 정말 싸늘해졌으므로, 유진은 꾹 삼키는 편을 택했다.
앨런의 화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풀렸다. 풀린 기념으로 둘은 데이트를 했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마침 1층에 젠코가 입점했다. 새로 입점한 젠코에서 무언가 사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기념될 것을, 겸사겸사 앨런의 손가락 사이즈도 재보고 말이다.
하지만 이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은 기분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금세 괴이들의 백화점으로 흘러들어갔다. 젠코는 나오지 않았고, 사람의 손가락과 ■과 ■■■ 등을 팔았다.
유진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분명 카지노에서 그와 도박을 하던 괴이는 백화점의 주인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으로 온 것도 어떤 운명일지도 몰랐다. 위험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앨런이 휘말릴지도 모른다.
“젠장, 우릴 부르는 횟수가 너무 잦아….”
우리, 가 아니라 나, 에요, 앨런. 저들은 날 원해요. 그러니 나만 가면 돼요. 유진은 자살희망자가 아니었고, 자기가 없는 세상에서 가족과 앨런이 슬퍼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앨런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라면 역시 효율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앨런은 연약했고, 병약했다. 고통 따위 견디지 못할 텐데. 차라리 유진 그 자신이―
“…안 돼, 문이 닫혀 있어. 백화점 기록은 몇 번 본 적 있어. 지하 주차장으로는 절대 가면 안 돼. 지하 666층으로 향할 수도 있는 엘레베이터는 절대 이용하면 안 되고, 에스컬레이터만 써야 해.”
앨런이 중얼중얼 기억을 되짚었다.
“나가는 출구는 1층, 혹은 5층의 구름다리. 구름다리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면, 원래의 공간이 나오기도 한다고 기록… 현재까지 나가는 방법은 VIP가 되기, ■■와 ■■■를 팔기, 직원으로 일하다가 퇴근하게 되면 이 세계에 구속당하므로, 손님으로서 나가는 것을 권장…”
백화점은 파훼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괴이 등급도 높았다. 앨런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VIP가 되어 나가기로 했다. 현실에서도 VIP의 인생을 살아왔으니, 그런 흉내를 내는 것에는 익숙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이 장소가 괴이들의 백화점이라는 걸까.
두 사람은 쥬얼리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반지를 산다는 핑계로 매물을 보았다. (사실 유진은 정말 반지를 사주고 싶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 반지는, 핏빛을 띄고 있기도 했고, 이상한 효과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가끔 사람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같은 게 보였지만, 이제 저런 건 신경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네, 이 제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인기가 좋은 약혼반지인데요…….”
“가장 인기가 좋은? 그건 가장 흔하다는 뜻 아닙니까?”
유진이 싱글싱글 웃자, 머리가 지퍼로 되어 있는 괴이가 당황했다.
“난 그런 흔해빠진 건 원하지 않아요. 남들과는 다른 걸 원합니다. 우리를 보면 모르겠어요? 난 다른 곳에서 보석을 취급하던 사람입니다.”
유진의 기세에 압도당한 괴이가 네에… 하며 다른 것을 꺼내왔다.
“그럼 이 반지는 어떠세요? ■■를 ■■해서 ■■■■당한 인간의 내장에서 꺼낸 보석인데,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를 ■■하는 효과가 있어서…….”
앨런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내 손에 다른 사람의 몸에서 추출한 건 끼고 싶지 않군요. 불결해…. 이런 것만 있으면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여기가 좋은 물건을 취급한다는 말에 왔는데, 우리가 고작 이런 거나 보러 온 줄 압니까?”
앨런의 오만한 말에 괴이가 다시 쩔쩔맸다.
“그럼 이 반지는요? 아름다운 다이아는 평행우주 n-7865AR에서 캐온 다이아에요. 그곳의 인간들은 다이아를 너무나 원한 나머지 지구의 모든 것을 다이아로 바꿔 버렸어요, 지구 전체가 하나의 다이아가 되었죠. 외부 표면에서 조금 캐 온 거에요.”
“그러니까 흔해빠진 다이아군요. 마케팅의 기본을 모릅니까?”
유진이 일갈하자 괴이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괴이가 어수룩한 게 다행이었다. 유진은 밀어붙였다.
“단순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따라할 수 없고, 희귀하고, 독특하고, 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원해요.”
괴이가 주저했다.
“아이 참, 이건 정말 귀한 건데, 정말 VIP 분들에게만 드리는 건데….”
그러더니 결심한 듯, 뒤에 가서 무언가를 가져 왔다. 밸뱃 상자 안에는 아름다운 다이아 반지가 들어 있었다. 수많은 반지를 봐 온 유진조차도 홀려버릴 것 같은 반지였다. 아니, 어쩌면 홀렸을지도 모른다—. 그걸 사는 동안 VIP 전용 출입구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원하는 곳을 생각하면 바로 나갈 수 있는 통로.
수표를 내려 했지만 괴이는 받지 않았다. 방법은 한 개였다. 누군가 한 명이 가져오는 것.
“저희는 이런 건 받지 않아요.”
“그렇다면 화폐를 가져오지. VIP 통로가 어디었더라?”
앨런이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그곳으로 유도한다면, 나갈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어수룩해 보이던 괴이가 강경하게 나왔다.
“그렇다면 한 분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마침 사장님이 오셨거든요…”
보석 가게의 사장이 왔다. 도망가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유진은 앨런을 보냈다. 앨런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기회를 봐서, 다른 것을 보고 온다고 도망칠게요, 앨런, 돈을 가지러 간다고 하고 VIP 통로로 나가요.”
VIP 통로는 생각한 곳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그러므로 앨런은 현실 세계로 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앨런은 유진을 두고 가는 것이 영 꺼림찍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유진은 느끼고 있었다. 이 괴이가 자신들을 호락호락 보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앨런은 전에 유진이 거짓말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날 믿어요, 앨런.”
사실은 믿으면 안 되었다. 그냥 도박이었다.
“내가 저 둘도 뿌리치지 못할 것 같나요? 이런 허접한 괴이들이라면 탈출 가능해요.”
앨런이 주저했다. 더 밀어붙이지 않으면, 정말 앨런은 나가지 않을 것이고, 희생자는 둘이 될 것이다.
“보석에 대한 얘기를 더 꺼내서, 흠을 잡고, 바로 뒤따라갈게요. 앨런, 문 앞에서 망설이지 말고 나가요, 내가 바로 뒤따라 갈 테니까.”
되었다, 이것으로 앨런은 나갈 수 있다.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될 테니까요.”
앨런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뻥긋거렸다. 그러더니, “만약 안 나오면 난 바로 다시 들어갈 거야. 그리고 널 찾을 거다. 그러니까……. 최대한 열심히 따라와.”
앨런이 뛰어간다.
유진은 나가지 못했다. 괴이 둘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이 인간이 무언가를 거짓말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유진은 화장실에 가지 못했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이 ‘사장’ 이란 것은 제법 눈치가 빨랐다… 그가 앨런마저 붙잡기 전에 보낸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손님, 약혼자 분이 오시지 않는군요….”
끼긱, 끼긱거리며 목소리에 노이즈가 섞인 쥬얼리 가게의 사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괴이들은 전부 인간보다 강하다. 유진 따위는 강하게 붙잡고 사지를 잡아 뜯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벌레의 다리를 집어뜯듯이.
유진은 사장의 가슴에 빛나는 브로치를 보았다. 아름다운 보석은 홀린 듯이 유진을 끌어당겼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그 보석을 잡아 뜯어야 한다고 느꼈다.
“인간… 사실은 보잘것없고 하찮은 인간인 것이 틀림없지요?”
“네, 사장님… 저 인간이 우리를 농락한 거예요!”
직원 괴이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유진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 지퍼가 채워졌다. 아니, 온몸에 지퍼가 생기고, 그 안에서 그림자와 내장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런… 우리를 농락하다니. 그래도 머리는 꽤나 쓸만하게 팔릴 것 같고, 몸은 우리 쥬얼리의 재료로 쓸까요… 아니면 마네킹으로 파는 것도 좋겠네요….”
마네킹.
살아 있는 채로 목이 잘린 채로 온 몸이 개조당한 채로 끔찍하게 거대한 옷핀을 꽂고 ‘괴이’의 기준에 맞게 뒤틀린 자세와 썩어가는 다른 팔다리를 달고……그런 건 오는 길에 보았다. 그리고 죽지 못한다.
유진은 지퍼가 열리기 시작하는 한쪽 팔을 보았다. 피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현실감각이 없었지만 지퍼가 다 풀리면 몸에서 똑 소리를 내면서 떨어질 것이다.
사장 괴이가 그를 제압하기 위해 다가올 때, 유진은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팍의 브로치를 잡았다. 어쩌면 정전기가 흘렀을지도 모른다.
브로치를 몸에서 잡아챘을 때, 그의 팔다리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장의 손길이 닿은 곳이 보석화 되어가며, 자수정과 같은 것들이 관절에서 자라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해냈다. 브로치를 빼앗자 직원 괴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가 사장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내 브로치…!”
“안타깝지만…….”
혀가 수정화되어간다. 하지만 유진은 가까스로 브로치를 가슴에 달았다. 끼우지 않아도 가슴팍에 달라붙은 브로치. 붉은 보석을 달고 있던 것은 어느새 금빛 보석으로 바뀐다. 백금과 금빛 다이아로 만들어진 브로치는 마치 유진을 위한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사장이야.”
그리고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간다.
그는 이제 인간을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브로치를 빼앗긴 사장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브로치를 뺏자마자 유진은 경비를 불렀다.
“경비! 경비! 여기 도둑이 들었어요!”
유진의 화려한 말빨은 괴이 하나를 담구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니까, 같은 조건이라면 유진은 말로 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브로치를 유진이 달고 있으니, 직원 괴이도 유진 편을 들었다.
“사장님 말이 맞아요! 이 사람은 누구람… 사지도 않은 우리 가게 보석을 잔뜩 숨겨놓고 있었다고요! (그야, 그가 사장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저희 경비팀에서 처리하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경비팀의 보안능력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겠군요.”
유진은 늘 그랬듯이 가게의 주인처럼 경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어색함이라고는 없었다. 전 사장 괴이는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그러나 온몸이 싸늘했다. 수정화 된 곳은 돌아왔지만, 떨어진 팔은 돌아오지 않았고, 유진은, 유진은 잘 알았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을.
몸이 차가워진다.
‘나’는 누구지? ‘나’는 유진 제라드. 나는 나는 유진 제라드, 젠코의 아니 ■■의 ■■■백화점에 입점한 ■■의 사장 ■■은 ■■앨런 ■■■■■■ 약혼 ■■□
살아있는 대가는 변형이다.
■■
앨런. 앨런은 내 약혼자다. 기억해내면,
■ 백화점을 ■■보석 ■■■ 이곳을 나는 사장, 번영하여 인간 제물 이대로
■ 앨런을
■■
■■■■
■■■■■■■■■■■■
앨런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그는 알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것은 그의 약혼자밖에 없을 테니까…….
[앨런.]
다정하고 상냥하게 부르는 이 목소리를 앨런은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 위에 달린 것은 독수리의 머리였다. 앨런은 입술을 짓씹었다. 결국 거짓말이었던 거다.
[이제는 내가 이 백화점의 사장이에요. 원래 사장은 도박도 너무 많이 하고, 경영도 엉망이었거든요.]
유진이 앨런의 손을 잡았다.
■■■■■■■
■■■■■■■■ ■■ ■■■ ■■
앨런은 손을 뗐다. 괴이가 되어버린 유진에게서는 끔찍한 말들만 들려 왔다. 아니, 앨런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앨런을 기다렸어요. 언제 와줄까 해서. 당신에게 꼭 주고 싶었거든요.]
유진이 품속에서 작은 밸뱃 상자를 꺼냈다.
[그때 사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손을.]
앨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독수리의 눈이 앨런의 약지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끼지 않은 약지에 유진은 반지를 끼웠다. 그때 사지 못했던 반지를.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해 주세요, 이제 난 어떤 것이라도 줄 수 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요.]
약혼반지로 앨런은 귀속되었다. 그래, 앨런은 어쩌면 유진이 이런 꼴이 될 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네킹이 되는 것보다 최악인 결말일 줄은 몰랐지만. 이제 영영 유진은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앨런 또한 나갈 수 없다. 앨런은 그를 내보낸 유진을 위해서 이 생명을 쓰기로 몇 개월 전 다짐했으니까.
“유진.”
앨런이 먹먹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고마워.”
[그 말 말고 나한테 할 말이 하나 더 있지 않나요? 내가 항상 당신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 말이에요, 앨런.]
손을 잡아도 한쪽 귀에 들리는 것은 삐 소리와 함께 ■■ ■■ 사랑 앨런 ■■■■ ■■■■■ ■■여기에 ■■■■ 이런 말들 뿐이다.
앨런은 유진의 심상세계가 이제 그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갔음을 알아차렸다. 거짓말을 했다고 이제 화를 낼 수도 없다.
[물론 내 손을 잡고 있으니 앨런은 당연히 알겠지만, 그쵸?]
맹금류의 머리가 애교를 부리며 비비적거린다. 반짝이는 부리, 흰머리수리다. 앨런은 흰머리수리를 좋아했다. 그들이 교미 전 반려를 구할 때 하늘에서 빙빙 도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가 흰머리수리가 되어버리면, 역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생각이 든다.
“그래, 유진.”
앨런은 유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사랑해. 나와 결혼해 줘.”
그리고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앨런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반지가 아프게 조여 왔다.
오늘.
앨런이 내 청혼을 받아 줬다. 언제나 생각했지만 반지는 앨런에게 잘 어울린다. 이제 앨런은 돌아갈 수 없다. 앨런이 말한 대로 그를 도와줬다던 인간들은 밖으로 보내 줬다. 내가 사장이 된 후로 버러지같은 인간이란 미물들은 백화점에 들어온 이상 현실로 도망갈 수 없으니까. 앨런을 보내 줬던 VIP 통로도 보수한 지 오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티켓을 주고 돌아갈 수 있는 극장으로 안내했다. 앨런은 안도했다. 앨런의 친우들에게 도움이 되어 다행이다. 둘 다 꽤나 반반하게 생겼는데, 앨런은 그들 따위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내 머리에만 감탄했다. 앨런은 원래도 조류를 좋아했으니까, 내 머리가 꽤나 마음에 들 것이다. 어떻냐고 물어보자 키스는 어떻게 하지? 하고 묻기에, 앨런에게 [키스]를 해 주었다. 앨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익숙해지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듯 하다.
76일
앨런과의 결혼식을 올렸다. 모두에게 앨런이 내 것임을 알린 것이다. 베일을 써서 앨런의 머리는 감췄다. 앨런의 얼굴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왜 머리를 바꾸지 않았냐고 귀찮게 구는 놈들이 많으니까. 앨런은 아직까진 자기 머리가 자기 목에 붙어 있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 아프지. 앨런은 아픈 걸 싫어한다. 언젠가는 바꿔야 하겠지만 나도 앨런이 무서워하는 건 보기 싫으니까 지금까지는 괜찮다. 앨런도 결심할 때가 필요할 것이다.
참, 웨딩 가터에 드레스까지 앨런이 거부했었지만 결국은 받아들였다. 요즘의 앨런은 제법 고분고분해진 맛이 있다. 웃는 모습이 귀여우니까 나도 행복하다.
458일
앨런은 자주 웃는다. 반지의 효과가 꽤 좋다. 물론 날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신혼여행지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 앨런에게 당신의 머리 때문이라고 했다. 앨런은 조금 시무룩해진 것 같다. 예전에는 시무룩해지진 않았는데 요즘은 다른 자들도 다 머리가 바뀌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여기의 학자들이나 고위층 부인 모임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고. [역시 머리를 바꿀까요? 좋은 머리가 있는 곳들을 아는데…] 라고 속살거리자 앨런은 거의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쉽군. 그리고 자기는 아직 이 머리로 족하다고 했다. 그것보다 다른 것들을 사 달라고 졸랐다. 앨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원하는 것들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들을 걸칠 때마다 앨런은 이 곳에 귀속되어 간다.
앨런이 내 목의 절취선을 만진다.
“너도 많이 아팠겠지.”
안타까워하는 것 같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앨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말하면 앨런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런, 그런 표정은 침대에서만 해 달라고 했는데도.
“내가 곁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지금은 곁에 있으니까. 당신이 머리를 바꿀 땐 내가 있어줄게요.]
앨런은 품에 안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표정은 분석하는 맛이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761일
앨런은 나를 볼 때마다 좋아하는 티를 감추지 못한다. 예전의 퉁명스러운 앨런도 좋지만 역시 사랑이 넘치는 신혼이 좋은 거다. 아이가 생기고 나면 앨런도 이렇게 나에게 웃어 주지는 않겠지… 맞아, 앨런도 아이를 갖는 데에 동의했다. 하지만 당장은 싫고 조금 더 신혼 생활을 즐기자고 했다. 아이를 가질 때가 앨런이 자신의 머리에 작별 인사를 할 때일 것이다. 벌써부터 앨런은 걱정이 너무 많다. 내가 앨런의 손을 잡아 준다고 했다. 앨런은 항상 잡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맞아, 그랬다. 하지만 앨런이 머리를 빨리 달지 않으면, 나는 앨런을 내 몸에 이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앨런은 아직까지 한낱 버러지같은 인간의 육신을 탈피하지 못한 슬프고 ■■■한 존재니까. 그러므로 내가 어떤 취급을 하더라도 앨런은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앨런은 모르는 것 같다. 그 육신을 나는 당장 ■■■■■■■■■■ 할 수 있음에도 간신히 참고 있는데. 아니, 알고 있나? 손을 잡고 있던 앨런이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미안하다고 사과해 왔다.
1068일
오늘, 앨런의 머리를 바꿨다. 앨런은 카라칼 머리를 골랐다. 사실 내 의견도 많이 들어갔다. 나와 같은 조류로 맞추고 싶다고 했지만 나도, 헤드 샵의 직원도 모두 반대했다. 아마 누구한테 말해도 앨런은 카라칼이었을 것이다. 고급스러운 카라칼 머리가 앨런과 어울렸다. 앨런은 항상 내 목의 절취선을 만졌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목도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려운 모양이었다. 앨런은 자신의 목을 만졌다. 창백한 얼굴이 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역시, 안 되겠어, 유진, 나는…!” 나는 앨런의 양 손을 꽉 잡아 고정시켰다. 싱글생글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는 언제고. 앨런이 몸부림쳤다. 그러니까 제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여기에서는 미친 것이나 다름없다. 앨런이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난 강행하라고 외쳤다. [앨런도 내게 고마워할 거예요. 그쵸?] 이빨을 뽑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꼴이다. 그래, 앨런이 여기서는 나보다 어린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앨런이 나가고 나서 ■■■■■일 동안 있었으니까. 그동안 앨런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아니, ■■■■■일이나 더 먹어도 앨런보다 어린가? 어린 것도 좋은 것 같다. 앨런이 나를 살짝 애 취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앨런이 몸부림친다. 저런. 하지만 목이 뎅강 잘려나갔다. 도르륵…. 멀쩡했던 머리가 굴러간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겁에 질려 두려워하는 머리통을 나는 집어들었다. 아, 머리만 남은 앨런. 몸만 남은 앨런. 나는 앨런의 머리에 키스했다.
[카라칼로 달아 주세요.]
앨런 또한 다시 태어날 시간이었다. 마침내, 나와 같은.
3879일
에일레이가 유치원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자기도 빨리 머리를 달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아직 에일레이에게는 너무 이르다고 했다. 에일레이는 알겠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앨런은 벌써부터 에일레이에게 무슨 머리를 달아 줄지 고민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우린 행복하다.
[그쵸, 앨런?]
이제는 거짓말을 해서 앨런을 상처 줄 일도 없으니까.
앨런은 내게 사랑한다며 키스했다. ■■에도 익숙해진 모양새에 나는 썩 만족했다. 둘째는 힘들까?
[…생각해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