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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제세동기Defibrillator 1

유진 제라드는 명실상부 행운아다. 

그는 0.00008%의 확률로 영국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전 세계 인구 18억 중에서 영국에서 태어날 확률은? 그리고 귀족이 될 확률은 또 어떠한가? 게다가, 어디 한미한 귀족 집안도 아니다. 제라드 자작 가문이라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돈이 없는 집안도 아니었다. 제라드 가문은 다이아몬드 광산도 하나 가지고 있었고, 쓸만한 영지와, 돈 나올 만한 것은 다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 귀족은 일하는 것이 아니라며 투자로 돈을 불린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도 있었다.

또한 그는 제라드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을 차기 후계자였다. 그에게는 누이 한 명 밖에 없었고 아버지에게도 따로 형제는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신체가 건강했으며, 아름다운 은발과 신비로운 금안을 가지고 태어나 외모조차도 흠 잡을 곳이 없었다. 한 번 책을 읽으면 내용을 전부 기억할 뿐 아니라 요점을 뽑아 역으로 질문할 수 있는, 가정교사에게서 찬사가 나오게끔 하는, 미래가 기대되는 총명한 아이였다. 성격에도 그늘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감 넘쳤고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서글서글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아이 시절부터 사교계 파티장 내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아이들은 유진 제라드와 친해지고자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라기에는, 사람의 심리를 읽는 것처럼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성인이 된다면 어디서든 시선을 잡아끌고, 실세가 되어 부족할 것 없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진 제라드에게도 부족한 점이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유진이 다섯 살, 그의 누이가 열두 살일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덜 받은 것은 확실히 슬픈 일이다. 고모나 고모할머니들, 이모와 같은 자들이 와서 유진을 돌봐 주었으므로, 그가 사랑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란 것을 갖춘 이래로 유진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어린아이였지만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죽음과 생명에 관한 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 인간이 신의 자리에 침범하려는 월권이라는 것.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파도에 휩쓸리는 인간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보내야만 한다는 것. 뇌리에 각인된 진리였다. 



 

행운아 유진 제라드는 열 살 되는 해에, 자신의 형제가 될 이를 처음 만났다. 아버지가 문란하게 놀았던 과거와 맞닥뜨린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피 섞이지 않은 형제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에는 혈연지상주의인 귀족 가문에서 그저 허울 뿐인 형제이리라. 

“인사해라, 유진. 새어머니가 되실 분이다.”

진저 빛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얌전하게 묶어 올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속눈썹이 무척이나 풍성하고 길어서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들이 있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처녀 같지도 않았다. 어쨌든, 유진의 친어머니와는 전혀 다르게 생겼으므로 유진은 바로 그녀를 새어머니 취급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누이도 같은 마음이리라. 

“안녕, 네가 유진이구나?” 

미소를 띈 그녀가 영어로 인사했다. 하지만 억양은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의 친구 중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서 오는 이들의 억양 같았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어떤 기대감은 보였지만 불안해한다거나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 난 카테리나 유니우스란다.” 

(**카테리나와 캐서린은 같은 이름이다. 부르는 방식의 차이)

“안녕하세요. 카테리나 씨.” 

유진이 예법을 지켜 인사했다.

“편하게 캐서린이라고 불러도 돼. 제라드 씨에게서 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단다. 아주 총명하고 잘생긴 아들이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나도 꼭 너를 만나보고 싶었어. 그리고 우리 아들도… 형제가 있었으면 했거든.”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로 유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누나 등이 네덜란드로 간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할머니와 고모할머니, 고모와 이모들이 수근거림을 떠올렸다.

“그래도 과부잖아요! 세상에. 우리 에드워드라면 처녀와 결혼해도 빠지지 않는 모양새인데. 실제로 영국 사교계 내에서 얼마든지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맞이할 수 있다고요.”

그들은 새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유진은 몰래,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아이인 척, 터키쉬 딜라이트를 씹어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어쩌면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동정심을 사도 좋겠지. 

“그래도 그 가문이 상당히 부유한가 봐요. 네덜란드에서 알아주는 거부랬던가. 하! 부 따위 필요 없는데. 귀족 지위가 있기는 하지만 필요 없어요. 우리는 돈 많은 가문보다 영국인으로서의 예의를 가진 조용한 여식을 원했다고요. 유진과 에블린에게도 어머니 노릇을 잘 할 수 있는 안주인 말이죠!”

“그러게요. 상인 가문이라면 천박하지 않겠어요? 전 남편도 독일인이었다는데. 차갑고 딱딱할 게 분명해요.”

“어머니 노릇? 아들이 있다는데요. 심지어 에블린이랑 나이도 같다네. 딸이라면 모를까 아들이라니. 부가 있으면 무엇해요? 그게 전부 제라드 가문의 돈이 된다면 모를까, 분명 이 아들의 몫이 되겠죠. 의미 없는 일이예요.”

“오히려 은근슬쩍 우리 것을 빼앗아가지는 않을지, 내가 이 눈 크게 뜨고 지켜볼 거야!”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유진은 새어머니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로 부가 있는 것은 맞대요? 과부라면, 세상에. 다른 남자를 잡아 결혼하면 되잖아? 왜 하필 우리 에드워드와?”

“모르겠어요. 에드워드가 얼굴이 잘생겼으니, 반했나 보죠! 정숙하지 못하긴.”

“그런데, 이 아들이 꽤 아프다던데요. 태어났을 때부터 심장병에 폐병을 앓았다고요. 어쩌면 다른 핏줄을 낳아주려나?” 

“어머, 제 어머니를 닮은 건가요? 이미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큰일인데.”

새어머니를 직접 만나 봐야, 이 모든 소문이 사실일지 아닐지 결정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제게 해를 끼칠 사람이라면 윗어른들에게 속살거리면 그만이다. 방법은 많았다. 

…그리고 직접 만나 얼굴을 본 유진은, 할머니와 고모, 고모할머니 등의 주관적인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새어머니가 될 사람은 생각보다는 강단 있어 보였고 아버지와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것 같았으며 유진에게도, 누이에게도, 나쁘지 않게 잘해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사랑에 눈이 먼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정말로 좋은 여자를 찾아 왔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는 행운아였으니까. 

아버지는 유진에게 형제가 될 이 또한, 소개했다. 

“그래요, 카테리나. 나도 유진에게 누이 말고도 형제가 있었으면 했소. 친하게 지내면 좋겠지. 유진. 이 쪽은 카테리나의 아들이다. 이름은 앨런이고, 이미 어엿한 작위가 있는, 유니우스 남작이기도 하지. 너와는 형제처럼 지내면 좋겠구나.”

카테리나 유니우스의 뒷편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년이었다. 그제서야 유진은 뒷편의 소년에게 눈길을 주었다. 사실은 조금 궁금하긴 했다. 내 형제가 될 이라면, 독일인 혹은 네덜란드인의 정체성을 가진 이라면, 어떤 성격일까? 독일 귀족 작위도 그렇게 약한 것은 아니라던데. 독일인들은 영국인과 달리 차갑고 날카롭고 죄다 군인 같다지. 나를 무시할까? 오만할까? 내 적수가 되어 줄까? 영국에서의 또래들은 전부 시시한 인간들밖에 없었다. 형제가 가지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유진은, 아. 실망했다. 

소년은 병색이 완연했다. 볼살은 들어가 있었고 눈가는 퀭했다. 그리고 그가 쳐다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이윽고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설 힘도 없어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진이 앨런과 악수했다. 맨살과 맨살이 맞닿았다. 

병약하다니, 실망이야. 곧 죽을 이 따위 유진에게 형제 노릇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적수가 되어 줄 수도 없었다. 재미를 느끼게 해주기는커녕 골골대다가 어디선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을지. 그렇다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죽어가는 인간 따위가 제 형 지위를 얻게 되다니. 그래, 죽기 전에 그것이라도 얻게 되서 영광이려나? 그래, 할머니께서는 좋아하시겠군. 새어머니 될 자의 부를 물려받을 아들이 이렇게나 병약해서야. 인생에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갈 자 따위 앞으로 기억하는 것이 더한 기력 낭비이리라……. 

바로 그 순간, 카테리나를 꼭 닮은 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긴 앞머리 사이로, 앨런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풍성한 속눈썹. 그리고 차가운 녹색 눈동자. 녹빛 눈동자가 그를… 그래, 쳐다보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앨런은 그를 “노려보았다”. 아주 일순간의 표정변화였지만 유진은 그렇게 “느꼈다”. 기민한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왜?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신선했다. 첫만남에서부터 그를 노려보는 이는 드물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유진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그에게 어떠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누이인 에블린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보았다면 착한 아이라고 했을 텐데. 천사같은 아이라는 말은, 유진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였다. 

“…안녕? 유진 제라드에요.”

유진이 먼저 인사했다. 그는 찰나 지나간 앨런의 적의에 눈을 조금 더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듯 굴었다. 자신은 귀여운 동생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앨런의 경계심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윽고 손을 뗐다. 

“앨런 유니우스.”

그리고는 자기 이름만 툭 내던졌다. 

“줄곧 형이 있었으면 했는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차가운 태도였다. 그래도 유진은 퍽 서글서글하게 이야기했다. 앨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제 어머니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앨런에게서 조금 더 상냥한 말씨가 튀어나왔다. 

“…하아. 미안해요. 제가 영어도 서툴고 독일 억양이라 차가울 수 있어서. 저도 동생이 생기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외동은 외로웠거든요.”

앨런은 어째서인지 유진이 아닌, 카테리나와 에드워드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앨런은 유진을 무시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 유진 제라드가 뻔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앨런이 콜록거렸다. 연기인지 진짜 기침인지 알 수 없었다. 진이 빠진 표정의 앨런은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인사했으니 됐죠? 어머니, …제라드 자작님. 죄송해요. 갑자기 찬 바람을 맞아서… 또 가슴이 아픈 것 같아요. …이만 침대로 가서 쉬어도 될까요?” 

카테리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떨어지고 싶은 거야.’

유진이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시종인 한 명이 앨런의 휠체어를 끌고 침실로 향했다. …저택에 엘레베이터를 설치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다정하게 저택을 공사하겠노라 말한다….

유진은 뒤돌아서며 생각했다.

‘저택을 공사해 봤자 몇 년이나 쓸 수 있을까? 곧 죽을 자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유진은 제가 좋아하는 함선 모형을 들고 앨런에게 향하고 있었다. 캔버스 천으로 돛, 구리 선으로 돛줄까지 만들어진 HMS 드레드노트 전함 모형은 요사이 유진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중 하나였다. 열 살 짜리 사내아이라면 으레 이런 것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 에드워드는 제 지인에게서 이것을 받아 왔다. 일반 서민의 몇 달 치 월급을 모아야 간신히 살 수 있는 모형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이라기에는 너무나 섬세했다. 금속 부품조차 장식이 아니었으니까. 

앨런의 방은 2층에 있었는데, 승강기 공사는 아직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더라도 걸어다닐 수는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배를 너무 오래 타서 더 안 좋은 상태였다고는 했다. 요사이 그는 시종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며 체력을 키우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도 병약한 안색이 나아지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때때로 에블린과 유진은 앨런의 방에 방문했다.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독일 남작의 방이라기에는 특별할 것 없었다. 옛날 고모가 쓰던 방이었다. 방에는 책이 빼곡하게 있었고, 그것은 모두 독일에서 실어온 것들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던 앨런의 유일한 취미가 책 읽기라는 것을 한 달이 지난 지금 유진도 알게 되었다. 가끔은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앨런, 있어요?”

유진은 전함 모형을 들고 그대로 앨런의 방으로 들어갔다. 앨런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라틴어 책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라틴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유진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표시였다. 앨런은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라틴어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지.”

“무슨 책인데요?”

유진이 앨런의 책 표지를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직 라틴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누이가 배울 때 따라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표지를 읽더라도 안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통 어려워 보였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

앨런이 사락, 책 한 장을 넘겼다. 그리고는 흘끔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깐 유진이 들고 있는 전함 모형으로 향했다. 

“전함 놀이를 하러 왔니? 해군 말이야.”

“방금 전까지는 그랬어요. 영국군 새 전함 드레드노트로요. 케이프타운까지 나아갔어요.”

앨런은 변함없이 미소를 지으며,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쳐부술 독일 제국 함선이 없어서 심심했나?”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살짝 어휘가 과격했지만 목소리와 말투를 들으면 그냥 어린아이가 노는 것을 귀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앨런은 유진을 귀찮아했고, 싫어했다. 그런고로 지금 이 말은 비꼬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멍청한 어린애였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유진이 앨런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 집에 독일 함선 모형은 없는 걸요? 앨런, 가지고 왔어요?”

“아니. 함선이나 군대, 전쟁. 이런 것에 관심은 없어서. 보아하니 넌 그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같이 놀아주지 못해 안타깝군.”

“괜찮아요! 나무로 만든 함선들이 있으니까요. 이것처럼 진짜 같진 않지만. 그걸 독일 함선이라고 하면 돼요.”

앨런의 눈썹이 한 쪽 올라갔다. 그는 책 읽기를 멈추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아, 이거야. 앨런이 일순간, 또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유진은 그 표정을 이끌어 낸 것에 대단한 기쁨을 느꼈다. 독일 전함은 영국 전함만큼 기술력이 대단하지 않다고 들었다. 바다의 패자는 영국이었다. 언제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전쟁 놀이에 큰 흥미가 없어. 쳐부수고 놀고 싶다면 너 혼자 놀렴. 적수를 단순히 나무로 설정하면 무슨 기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생각 없이 부수는 것만 할 거면 상관 없겠지. ”

그건 맞는 말이었다. 혼자서만 정교하게 제작된 함선 모형과 나무로 대충 만들어진 함선 따까리들… 그건 유진의 상황에도 부합했다. 유진은 적수가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상냥하게 말한 앨런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 유진을 무시했다.

“난 그런 전쟁 놀이를 하기에는 너무 바빠. 남작에게 네 놀이상대가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사치 아닐까? 시종인들에게나 놀아 달라고 하는 것이 어떤가? 네가 이 책들을 전부 읽고 나와 라틴어로 대화해 줄 것이 아니라면.”

“나중에 앨런이 라틴어를 가르쳐 주면 안 돼요?”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나진 않아서. 차라리 네 누이에게 부탁하지 그래?” 

에블린을 말하는 거였다. 저번에, 에블린과 앨런이 방에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유진에게는 날 세운 듯 굴었지만 앨런은 에블린에게는 그렇게까지 날 세우지 않은 듯 했다. 같은 나이또래의 여자아이라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에블린이 앨런을 생각한 것만큼 싫어하지 않아서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에게도 호기심이 더 컸던 것이다. 

“에블린은 분명 귀찮아할거에요… 그리고 에블린보다도 앨런이 라틴어를 더 잘 하는 것 같은데요. 아! 아니면 에블린이랑 나랑 셋이서 얘기해요.” 

“Der nervt ja ganz schön…. (귀찮게 구는군….)”

앨런이 책을 덮었다. 

“Dieser arrogante Bengel. Er nervt wirklich. (오만한 꼬마, 짜증나게 굴긴.)”

“앨런, 지금 독일어로 뭐라고 한 거예요?”

“귀여운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라고 했어.”

“아하, 정말요? 그럼 나하고 놀아 줄 거에요?”

“아니, 라틴어를 알려 줄게.” 

앨런이 책상 쪽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린네의 《자연의 체계》 (Systema Naturae),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고찰》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그리고 노트가 있었다. 

펜에 잉크를 묻힌 앨런이 노트에 문장을 썼다. 고풍스러운 필기체.

Vivere est cogitare. 

“무슨 뜻이예요?”

살아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죽은 거야.”

서 있는 앨런이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그늘이 져 잘 보이지 않는다. 유진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난 말야… 도무지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멍청한 것들은 딱 질색이야. 내가 또 뭘 싫어하는지 알려 줄까? 몸 건강한 것만 믿고 날뛰는 것도. 제게 주어진 것들만 믿고 철없이 나대는 애송이. 날 깔보는 오만한 것들. 제 스스로 이룬 것이 없는 멍청한 무리.”

앨런이 싱긋 웃었다. 녹색 눈동자가 차갑다. 유진은 그저 금빛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앨런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난 영국이 싫어. 제라드 씨도 너도 에블린도. 네 말 많은 친척들도. 영국 사교계도. 나와 독일을 무시하는 그 모든 작태가 짜증이 치밀어올라. 그래, 유진.” 

앨런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닿는 것도 싫어서 은근히 피할 텐데. 하지만 쓰다듬는 것에서 다정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어 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철없는 애송이에 아직 어린아이잖아? 어디 내 말도 고스란히 네 아버지와 내 어머니께 일러 보렴. 네가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무섭다는 감정일까? 아니면, 앨런의 행동이…….

“네게 있어서 내 생명이란 그저 체스 게임과 같은 내기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지? 그래, 기뻐해. 너, 내가 곧 죽을 것 같다고 했지? 맞아. 난 죽어버릴 거야. 그렇지만 유진, 죽더라도 네 앞에서 죽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앨런은 다른 책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유진은 그저 금빛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앨런의 작태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게 적수일까? 앨런의 증오와 분노를 받아내는 것은 더없이…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기분이 든다. 더욱 앨런의 분노를 유발하고 싶다. 죽어가는 존재가 나로 인해 맹렬하게 분노하는 것이 즐겁다. 더군다나, 다른 이들 앞에서는 가면 쓴 채로 구는 앨런이 저 하나 어쩔 줄 몰라서 이러는 것은 유진만 아는 비밀인 것이다. 

앨런에게는 안타깝게도 열 살 짜리 사내아이, 유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유진은 잉크로 노트에 한 줄을 적고 떠났다. 앨런이 적은 문장 바로 아래에. 

Vivere est amare Eugene. (살아있다는 것은 유진을 사랑하는 것이다.)

유진이 떠나고, 한참 뒤에야 앨런은 노트에 적힌 글을 보았다.

라틴어를 응용한 문장 한 구석을 적어 둔 행태에 앨런은 종이를 찢어 버렸다. 결국 뿌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고 만다. 

“…역시 알면서 모르는 척 한 거였군, 재수없기는.” 

말하자면 당신은 내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조그맣고 맹랑한, 얼굴만 아기 천사에 불과할 뿐인 애송이가 그렇게 앨런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일주일 뒤에 유진이 “Dieser arrogante Bengel”가 독일어로 귀여운 동생이냐는 뜻이 맞냐고 캐서린에게 물었다. 앨런은 곤란해졌다. 



영국에 온 지 삼 개월 만에, 앨런은 또다시 침대에 병져누웠다. 건강해지는 것 같아서 혼자 운동도 하고, 걸어다니던 것이 없었던 일인 것 같았다. 새벽녘, 차가운 바람을 쐬었다던가. 

끙끙대며 앓아누운 앨런의 침대에, 유진은 턱을 괴고 엎드렸다. 

“앨런, 앨런. 죽지 말아요.”

흥얼거리듯이, 유진이 말했다. 앨런이 들었는지는 불분명했다. 열이 올라 흐느적거리는 앨런의 머리 위, 물수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종인들은 계속 물수건을 바꿔야만 했다. 문 밖에서 카테리나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유진의 속삭임을, 앨런이 들었을까?

‘살아 있는 당신을 패배시키고 싶다.’ 

열 살 짜리 소년의 생각은 그닥 논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열망만큼은 강렬했다. 

눈을 느릿느릿 깜빡거리던 앨런이, 순간 눈을 크게 홉뜬다. 일순간, 앨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두근, 두근. 

앨런의 손목께에서 잡히는 맥박에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느릿느릿 병든 자의 맥박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네 앞에서는… 절대 죽지 않을 거야… 네가 모르는 곳에서…….”

콜록대며 앨런이 기침했다. 

“죽지 마요, 앨런. 난 앨런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앨런이 한숨 쉬며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 피를 토하며 기침해대는 꼴에 다시 또 사용인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유진은 나가야만 했다. 

“앨런, 형.”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영 앨런을 손에 넣기 힘들 것 같다는… 그런 생각.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유진 제라드가


원하던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