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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Chapter 2. 이름 짓기 02

돌이켜보면 블리스는 뭐든 느긋하게 하는 아이였다. 삼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재촉받은 적이 없었다.

위로 두 형이 있어 성취를 요구받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무엇이든 천천히, 네 페이스로 하면 된다고 말했다. 부자이자 귀족인 블리스가 조급해할 것은 없었다. 항상 느긋하게 낮잠을 잤고 그렇게 쉬면서도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연습을 그의 두 배는 하는 친구들에 비해 블리스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었다. (물론, 바이올린은 조금 더 노력하긴 했었다.)

한편으로 블리스는 배타적이고 수동적인 면이 있었는데, 그건 어쩌면 그가 노력할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친구를 사귈 때도 굳이 그가 많이 노력하는 점은 없었다. 아쉬울 게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쩐지 신수의 신부가 된 이후로는 재촉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블리스가 느린 것이었다면 블리스는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고 막내처럼 가만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블리스 때문에 블리스의 신수, 겨울과 북쪽과 죽음의 신수가, 이 까만 털 뭉치, 숯덩이 고양이 같은 아기 신수가 늦는 것 같아서 그 점이 미안했다. 

“’복덩이’라는 이름이라도 지어 줘야 하나…?”

“갸웅, 갸아웅. 갹!!” 

블리스의 말 때문은 아니지만, 뭔가 화가 났는지 신수가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먼지를 잡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보자 신수가 그저 귀여운 새끼 고양이 같아 보였다. 그래,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 줄까? (다이애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다.) 

블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어라. 이름을 정했다고요?”

흙투성이가 된 ‘복덩이’를 데리고 온 의현이 말했다. “안돼~ 같이 자려면 씻어야지~” “갸아악 우우웅!!” 버둥거리는 복덩이를 능숙하게 제압한 의현이 웃음 지었다. 

“잘됐네요! 용 님 이름은 뭔가요?”

“용 님… 께서 직접 골랐습니다. 구름 운雲 자를 써서 운입니다.”

“와. 똑똑하신데요?”

의현이 의외라는 듯 용을 바라보았다. 용은 “삐.” 라고 말하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림책을 고르시더니, 펼친 그림에서 구름을 골랐습니다. 용은 신묘하고 영험한 존재니까 다른 신수님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신 것 같기도 하고요.” 

현수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용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 두세 개로 긁어 주자 용은 기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용은 비를 내리는 존재니까 구름을 관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까요?” 

의현이 말했다. 그러더니, “산을 다스리는 우리 신수님에게는~ 산군이라는 이름을 지어 줘야 할까나? 뫼 산山 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붙여 줘야 하나~?” 하며 호랑이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복덩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어도 어떠한 걱정도 조급함도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너도 골라 볼래? 령岭(산 이름 령)? 준峻(높을 준)? 암岩(바위 암)?”

호랑이의 몸에 묻은 흙덩이를 털며 의현이 말했다. 호랑이는 “갸웅! 갸웅!” 하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벌써 힘이 있어 보이고 발도 두툼한 것이 거대하게 자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블리스의 신수인 표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보다, 동대륙어가 너무 많이 나왔기에 블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유일한 서대륙인인 블리스 입장에서 그들이 마치 고대어(라틴어) 같은 것들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서대륙의 고대어를 가져다가 이름을 지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앞으로는 운 님, 이라고 부를 건가요?”

의현이 말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데 그냥 운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의현이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현수는 생각했다. 역시 왕자이기에 높여 부르고 싶지 않은 건가? 떨떠름한 얼굴로 현수가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수님, 용 님인데 그냥 이름으로 막 부르기는 좀…….”

“왜요? 진명이 따로 있는데. 귀여운 시절에 귀여운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한때이니까~. 그래도 뭐, 하긴 복덩이라면 모를까 용 님은 똑똑하시니, 존대어를 좋아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지. 이름을 직접 정할 정도면 여쭤보는 게 어때요? 저는 용 님을 높여 부르겠지만.”

의현이 다시금 제안했다. 현수는 용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췄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린 용이 현수를 쳐다보았다. 용은 녹주옥 보석 같은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더 쓰다듬으라는 듯이. 종종 용의 마음을 짐작할 때마다, 현수는 이게 정말 자신이 신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인지, 아니면 신부이기에 그 마음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용이 그런 능력을 쓰는 것인지 궁금했다. (자기 자신이 생명체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리라고는, 짐작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제법 눈치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 왔던 것이다.) 

블리스가 소심하게 덧붙였다.

“정말로… 똑똑하시다면 대답해 주지 않을까요?” 

“그런… 그런 무례를… 그렇게…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현수가 말했다. 뭔가 알아들은 건지 용이 가만히 현수를 바라보았다. 품에 안겨 있던 용이 둥둥 떠올라서 현수와 눈을 마주친다. 현수가 얼떨결에 물어보았다.

“운 님께서는… 제가 높여 부르는 게 좋으십니까?”

용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의현과 호랑이, 블리스와 이제야 깨어난 검은 표범. 그리고 현수. 

“뺙.”

작게 삐약거린 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

의현이 감탄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거군? (복덩이는 말을 알아듣기는커녕 너무나 장난꾸러기였다) 현 수가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의현은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그럼 그냥 운, 운이라고?”

끄덕끄덕.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두둥실 떠다니다가, 현수의 머리 위에 앉았다.

“진짜로?”

“삐약.”

“…높여 부르는 것도 아예 하지 말까요? 아니, 말까?”

“뺙!”

“아, 알겠습, 아니 알았어….”

어쩐지 일련의 대화가 끝나자 의현이 작게 손뼉을 쳤다. 블리스도 박수쳤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여기까지는 블리스도 그렇게까지 조급해지진 않았다. 

문제는 해가 지고 식당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을 때 발생했다…. 



동대륙식으로 차려진 한 상 밥상을 먹으며 의현이 말했다. 

“그런데 검은 신수님은 우리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표범 신수님? 이름을 아직 안 정했나요?”

의현으로서는 당연하게도 그렇게 물을 법했다. 호랑이와 표범은 먹는 것이 같았는지, 고깃덩어리를 와구와구 (와웅와웅 소리를 내기도 했다) 먹어 대며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두 신수는 같은 고양잇과 대형종 신수로서 붙어 지낼 것 같았다. (특히나 몸싸움이라거나.) 

하지만 의현이 그렇게 물어 오자 블리스는 할 말이 없었다! 

“어어….”

“정해 놓은 건 있나요?”

“아니요……. 음… 전 서대륙 식으로 지어 볼까 하는데….”

“아하. 서대륙식. 거기도 멋진 이름들이 있겠죠. 정해 둔 게 몇 개 있으면 고르는 걸 도와줄 수 있어요.” 

“그… 그것도 아직 알 수 없어서… 어… 쇼콜라? 초코?”

“쇼콜라? 그게 뭔가요?”

현수가 물었다. 아차! 생각만 하던 걸 그대로 내뱉어 버렸다. 블리스도 멋진 이름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까만 몸의 신수를 보면 초콜릿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에게도 문학적인 재능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북쪽의 신수라고 루스 차르 공국* 계통의 이름들을 가져올 수도 없고….

[*루스 차르 공국 : 북쪽을 다스리는 넓은 나라.]

“…초, 초콜릿이요. 서대륙에서 먹는 귀한 디저트인데 동대륙 사람들도 달아서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아서….”

“아, 저고령당貯古鹷糖**! 분명 검은색에 가까웠지. 어울리는데요? 귀엽고.” 

[**저고령당 : 초콜렛을 한문으로 음역한 것]

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그는 ‘복덩이’ 라는 파격적인 이름을 붙인 만큼 ‘초코’라는 이름에도 별 부정적인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현수는 초코? 라고 몇 번 되뇌더니, 

“아, 그 무지막지하게 단 간식 말입니까….” 

하고 살짝 이상한 표정으로 표범 신수를 보았다. 보아하니 ‘복덩이’ 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블리스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하하. 서대륙 사람들도 음식 이름을 키우는 동물에게 붙이나 보네요~. 말한테도 그런 이름을 붙이던가요? 우리는 말에게는 정말 멋진 이름을 붙여 주는데.”

“우, 우리도 말한테는 멋진 이름을 붙여 줘요!”

블리스가 발끈했다. “파일드라이버Pyledriver라던가…. 프린세스 아테나라던가….”

실제로 블리스의 집에서 키우는 말들의 이름이었다. 

“갸우우웅!!” 

고기를 뜯어 먹고 마구 돌아다니고 있는 복덩이 때문에 검은 신수가 화가 난 건지 귀를 납작하게 내리고 쫓아다니고 있었다. 꼬리가 거세게 흔들렸다. 호랑이는 신이 나는지 마구 뛰어다녔다. 

반면 용은 물을 마시거나 풀을 뜯고 있었는데 고기 같은 건 잘 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얌전하고 우아하고 기품 있고… 어쩐지 상전! 귀족으로 살아온 블리스에게 (그리고 왕자인 의현에게) 운은 너무나 상전이었다! 마치 자기가 왕인 것 같달까. 

씩씩거리며 블리스에게로 온 표범 신수가 흥 소리를 내며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아 앉았다. 아무래도 용이나 복덩이와는 다르게 독립성이 있어 보였다.

‘조금 더 나한테 의지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블리스가 표범 신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쓰다듬으면, 신수는 가만히 그 손길을 즐겼다. 머리를 쓰다듬던 블리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내일까지 이름을 정해 볼게요!”

그는 기한이 있으면 미루지 않는 타입이었다. 마감일을 설정하지 않으면 또 이 이름, 저 이름 중에 고르다가 한 달이 지나갈지도 몰랐다…. 

“좋아요! 내일이면 이름을 들을 수 있겠네요.”

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만이, ‘그렇게 급하게 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