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하다….’
1층 발코니에 몸을 기댄 블리스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산의 정상에 위치한 신전이라 그런지 하늘이 더 맑고 푸른 것 같았다.
‘뭐라도 하기로 했는데….’
몇 년간 신전에서만 사는 것은 유배 생활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지금에야말로 기회야! 라고 생각한 블리스는, 바이올린 연습을 더 갈고 닦기 위해 여러 악보도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막상 자유롭게 풀어진 첫날이 되자, 할 일 없이 바깥의 경치를 구경하는 처지였다.
“우리 복덩이~ 잘하네~”
잔디밭에서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호랑이 신수, “복덩이”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는 의현이 보였다. 정원 산책을 하는 줄 알았더니 신수와 놀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호랑이의 긴 꼬리가 귀여웠다.
‘신수와 신부라기보다는, 애완동물과 그 주인, 혹은 아이와 엄마 같은걸….’
블리스가 신기한 듯 그들을 계속 관찰했다. 블리스는 그런 어린 생명체를 돌봐 준 경험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할 명계의 신수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쨍쨍한 태양 빛을 받으며. 아무래도 아직 아기라서 낮잠 자는 시간이 많은가 보다. 낮잠 자기 전까지 계속 보채듯 울어 대기에 블리스가 잠들 때까지 쓰다듬었어야 했다.
신수들과 신부는 1층의 빈방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파와 피아노가 있고, 간단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탁자가 있고, 커다란 발코니가 있어 바로 정원과 연결되어 있다. 정원에는 작은 수영장도 있고, 산책할 수 있고 꽃들도 많다. 말하자면 응접실 겸 취미실이다.
이 응접실은 문 없이 뚫려 바로 옆 방과 이어져 있었다. 옆 방은 서재였다. 책으로 꽉 채워져 있는 모습에 현수가 조금 전 감탄했었다. 아슈레에게 물어보자, “옛 신부님 중 한 명이 책을 좋아하셔서, 구비해 두고 있습니다. 저 책들은 모두 그분이 남기고 간 것입니다.” 라며 자유롭게 읽어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동서양의 책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신전에서 불경한 책들은 한 번 걸렀겠지만 그래도 읽을 책들이 많아 보였다.
현수는 도서실에서 가져온 책에 틀어박혀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블리스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용의 이름을 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용은 현수의 옆에서 하품하더니, 한가로이 허공에 둥둥 떠 도서관과 방을 탐색하고 있었다.
“자룡… 와룡… 용이 들어가는 이름은 별로인가? 음… 풍백… 우사… 아, 린이라는 이름도 어감이 예쁜데…….”
“삐약.”
어느샌가 현수의 뒤로 온 용이 둥둥 떠 책을 함께 보고 있었다.
“글자를… 이해한 건가?”
현수가 기대감을 갖고 물었다. 하지만 용은, “삐.” 하고 울 뿐이었다. 따라서 이게 알아들었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밖에서 동물과 하하 호호 소통하며 신나게 놀고 있는 의현과 다르게 현수는 동물과의 소통은 젬병이었다. 양의학을 배우고 있기에 그가 동물들과 한 가장 깊은 교감은 해부라고 할 수도 있었다. 신령스러운 존재인 용을 단순한 동물로 격하시키는 것이 옳은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현수가 느끼기에 다른 두 신수보다 용이 더 총명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절대 팔불출 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동양의 전통 이야기에서, 실제로 용은 아주 신령스럽고,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고, 가끔은 벌을 내리는 위대한 존재 아니던가. 그러니 곤룡포에도 왕이 수놓아져 있는 것일 테고.
“용 님의 이름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현수가 차분하게 말했다. 용이 말없이 현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에메랄드빛 눈동자. 작은 뱀만 한 몸통은 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깔로 반짝거린다. 동공은 날카로워 파충류의 것처럼 보인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더라도 딱히 귀엽다는 감상을 느낀 적이 없는 현수였지만, 이 작은 새끼 용이 현수를 바라보면, 어쩐지 작고, 예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작은 용이 언젠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용으로 성장한다니, 어쩐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았다.
“어떤 이름이 좋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름을 말할 테니,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현수가 다시 고전 책들을 펼쳤다. 비록 한의학이 아닌 양의학을 선택한 현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향을 버렸다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드래곤이 아닌 용이니, 그에게 이름을 붙여 준다면 고향의 언어로 붙여 주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수의 옆에는 먼 옛날 무인들이 난무하던 전국 시대의 이야기……. 위대한 왕들의 이름과, 위대한 장수의 이름들이 가득한 책부터, 동대륙의 신화와 옛이야기가 적혀 있는 책들도 있었다. 명부 같은 게 있었다면 참고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명부는 없었다. 그런 건 관청에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손가락으로 이름들을 짚으며 말했다.
“아랑, 연, 사다함, 남랑… 연이란 이름은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몸체를 가진 만큼 연聯, 연演이라는 이름이 꽤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용 하면 물을 다스린다는 것이 정설이니 그런 쪽으로도 어울리고. …다른 신부들도 그렇겠지만, 현수 또한 이 용의 성별을 몰랐다. 신수에게 성별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고. 그저 용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질 따름이다.
하지만 용은 “삐.” 하고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니까 이게… 용 님의 거절 표시인가.’
현수가 생각했다.
“…연이란 이름은 별로십니까? 그렇다면, 양월…… 겨울… 바다, 수권, 심해….”
현수가 여러 이름을 말했다. 용이 이름 하나하나마다 반응했다. 대체로 유음이 들어간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미묘하게 더 높은 톤으로 울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삐, 삐 거리며 어쩐지 거부감을 표했다. 완전히 좋다 하는 이름은 없었다.
“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삐약!”
‘어쩌면 그냥 아무렇게나 울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용 님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지도….’
현수는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책에 코를 박고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블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블리스가 쭈뼛거렸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현수가 먼저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름을!”
“저….”
하지만 두 사람의 말이 겹쳐 버렸다. 블리스는 합죽이가 되었지만 현수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하. 먼저 말해요.”
“다른 게 아니라 이름… 이름 정하셨어요? 이름 어떻게 정하실 거예요?”
블리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느긋하게 속으로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복덩이’처럼 대충 지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쪽도 떠오르는 이름이 포르테, 메조 포르테… 아니면 초코, 쇼콜라(까만색이었으므로) 같은 것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민 중입니다. 아무래도 신수님이 자기 의지가 확고하신 것 같아서 직접 이름을 고르라고 하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는 것 같아서요. 블리스 씨는 골랐나요?”
통성명하며 블리스는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현수에게 일러뒀었다. (플레처 씨, 라고 하면 어쩐지 형들이 먼저 생각났다. 앞으로 계속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데 딱딱하게 부르는 것도 정이 없어 보였고) 차분하게 물어보는 현수의 말에 블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진명이 있다고 했으니까… 오히려 이름을 짓지 못하겠어요.”
“진명은 평소에 부를 일이 많이들 없다고 하지만, 저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차라리 진명을 알게 된다면…… 거기서 조금 변화해서, 의미를 따 와서 이름을 지어 드릴 텐데 말입니다. 허투루 이름을 지어 드리고 싶진 않아요.”
현수가 용 신수를 조금 쓰다듬었다.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옥빛 눈동자가 영롱한 아름다운 신수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삐약대지도 않았다. 블리스가 보기에 (뱀인지 낙타인지 사슴인지 도롱뇽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길쭉한 몸뚱아리는 아직 신기했지만) 이 신수는 확실히 영험해 보이고, 똑똑해 보였다….
“뺙.”
작게 소리 낸 용이 현수 품에서 벗어나 하늘을 날아다녔다. 언제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하늘을 부유하지? 의외로 블리스와 현수는 금방 적응했지만 현수는 종종 이런 신령스러운 힘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수는 날아서 책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장에 있는 책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어떤 책의 책등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다시 삐약삐약 하고 현수를 불렀다. 누가 봐도 원하는 게 있는 울음소리였다. 현수가 일어서서 책장으로 향했다.
“네, 신수님. 이 책이 보고 싶으세요?”
“뺙!”
그 책은 동화책이었다. 동대륙에서 만들어진, 어린아이들이 보기 좋게 그림이 많이 그려진 책이었다. 현수는 갓 태어난 용이 어떻게 알고 그 책을 고른 건지 의문이었다. 묵묵히 동화책을 꺼낸 현수가 책을 들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용이 얌전히 현수의 어깨에 앉았다.
“와아. 지금 신수님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한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삐약 삐약거리시긴 하지만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네요… 영험하시긴 한가 봐요.”
영험하지만 아직 어려서 책을 꺼낼 정도의 능력은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현수는 책을 펼쳤다. 어린 용의 눈이 책에 집중됐다. 그림을 유심히 보던 용이 현수를 바라보았다.
“삐약.”
“음… 넘겨 드릴까요?”
“뺙!”
넘겨 달란 뜻이군. 용이 글을 직접 읽고 이해하는 건지, 아니면 그림으로 이해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수는 용이 자신을 바라보면 책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어느새 블리스도 조금 더 가까이 와서 그림을 구경하고 있었다. 동대륙 언어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수묵화로 그려진 삽화를 감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언어를 모르는 이도 이해될 수 있을 만큼 잘 그려진 삽화였다.
평온하게 책 페이지를 넘기던 순간, 신수가 갑자기 제 몸을 써 책 위에 올라탔다.
그림을 잘 구경하고 있던 블리스도 이상하다는 듯이 용과 현수를 쳐다보았다.
“뺙! …삐약!”
용은 몸으로 그림을 누르면서 코(주둥이)로 어딘가를 쿡쿡 찔렀다. 아예 내친김에 꼬리로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이건…….”
용이 가리킨 그림은 구름이었다. 옥황상제를 만나러 가기 위해 천계로 올라간 것을 그린 삽화에는 유난히 구름이 많았다.
“…구름? 구름 운雲 자 말입니까?”
현수가 물었다. 그러자 용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조금 더 큰 울음소리로 삐약삐약 울었다.
‘이럴 수가. 우리 용… 님은 혹시 천재가 아닐까?’
현수가 감탄했다. 직접 이름도 고르다니? 어쩌면 진명이랑 관계있을지도 몰랐다.
“운, 운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구름이라는 이름은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구름에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보아서, 용은 확실한 자기표현을 할 줄 알았다.
“알겠습니다. 운, 님…. 앞으로 그렇게 불러 드리겠습니다.”
현수가 어쩐지 감동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블리스는 순식간에 이름을 정한 용과 현수를 보며 생각했다.
‘설마, 또… 내가 제일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