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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화

     

 

 

이제 당신에게 한계는 없습니다.

―당신의 클론을 조종하세요, 뇌만 남아도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몇 번이고 만들 수 있습니다, 클론.

―당신이 만족하는 인격이 될 때까지, 반복하셔도 추가 비용 제로!

 

 

고층 빌딩의 위에 매달린, 화려한 전광판 속에서 반짝거리며 바뀌는 문구를 저는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또 유리가―하아……. 사람도 많은데 휩쓸리고 싶은 건가? 붙어 오기 힘들면 손이라도 잡아.―제 손목을 끌고 갑니다.

어쩐지 미심쩍은 광고입니다.

 

유리와 함께한 지 닷새가 지났습니다.

유리는 저를 이곳저곳 참 많이도 데리고 갔습니다. 제가 로봇이 아니라 진짜 인간 블리스였다면 아마 벌써 지쳤을 거예요.

유명한 음식점, 야구장, 여러 유명한 인공 건축물들(가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곳으로요), 카지노(저는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 영화관, 도서관, 아쿠아리움(인공 물고기가 가득 차 있었어요), 재즈 바 같은 곳들이요.

그중 하나는 인공 잔디와 인공 새와 인공 청설모, 인공 호수, 인공 나무가 가득한 공원이었는데요. 유리는 짭이라고 혀를 찼지만 저는 만족했습니다.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물결. 예쁘지 않나요? 유리. 저건 가짜가 아니잖아요.”

……햇빛은 가짜가 아니지.”

왜 햇빛만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습관적으로(공원에서는 금연입니다―죄다 짭인데 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던 유리가 또 인상을 찌푸렸네요. 몰라서 묻냐는 듯이요.

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제가 웃으니까 불퉁하게 더 인상을 찌푸리는데요, 닷새 동안 저는 유리에게 적응했습니다. 이제 이 남자의 이런 얼굴이 저를 위협하기 위해서 짓는 표정이 아니라, 그저 원래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심통이 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죠. 뭐가 그렇게 다 기분이 나쁜지는 몰라도. 사춘기 소년보다도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심술부리는 열 살도 안 된, 어린 남자애 같기도 하고. 이 남자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봤으면 좋겠는데.

물론, 이런 생각을 유리에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유리는 정말 삐질 테니까요.

 

예전에는 다 진짜였어.”

 

유리는 아직도 담배를 물고 있습니다. 애꿎은 쓰레기 하나를 잡아다가 호수 쪽으로 던져 버리네요. 물론 인공 호수의 로봇 오리들은, 전부 쓰레기를 수거하는 기능도 있을 테니 금방 사라지겠지만요…….

 

저걸 봐. 호수는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치워 대는 가짜 오리새끼들. 그래봤자 어차피 호수도 가짜다. 진짜는 쓰레기뿐인데도. 저게 예쁜가?”

예쁘죠. 유리, 우리가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진짜로 받아들이면. 전부 진짜인 거 아닐까요.”

사물의 본질은 바뀌지 않잖아.”

그렇게 따지면 저도 가짜인걸요. 하지만 지금 여기서 유리랑 같이 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여기 있는 진짜 제 자신이니까. 지금 이 시간은 진짜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저는 난간에 기대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저는 이 시간이 좋아요. 유리랑 함께 호수를 보는 지금이… 무척 평화롭고 좋네요.”

 

유리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네요. , 쳐다본다고 될 일인가요. 제가 좀 논리적이게 말하긴 했죠.

제 승리입니다. 저는 뿌듯하게 웃으며 유리를 바라봤습니다.

 

―…….”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굳어 버렸다고나 할까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유리의 표정은 울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인상을 한없이 구긴 것 같기도 했습니다. 치켜 뜬 두 눈이 어째서인지 저를 또렷하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굳게 다물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힘이 들어간 턱은 심통이 아직 풀리지 않은건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얼굴은 저렇게 붉어져 있는 걸까요?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왜인지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블리스.”

 

호수에서 반짝거리는 햇살처럼 따뜻한 목소리가 저를 부릅니다. 그 따뜻한 목소리에 저는 순간 밤의 유리가 낮에 저를 부른 줄 알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 여전히 굳은 얼굴이에요. 하지만 유리는 멋쩍은 듯이 제 시선을 피하다가, 뒷목에 손을 얹더니, 다시 애써 저와 눈을 마주하고는, 웃어 보입니다.

지금까지 억지로 대충 짓던 미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보는 사람을 무섭게 하는 웃음이 아니라― 굉장히 기쁜 말을 들었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소년처럼 웃었어요.

, 유리가요. 유… 리가……!

유리 살티코프가요―!

코어가 덜컥합니다.

엄청난 충격입니다. 낮의 유리는―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예요?!

 

하하, 너 다운 생각이야.”

 

저는 멍하니 그 웃음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유리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군요. 그런 발견에 놀라워하면서요.

한참 동안 우리는 멍하니 호수를 바라봤습니다.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 호수는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말했는데도, 유리는 제가 질릴 때까지 공원에 있을 수 있게 해 줬습니다. 마침내 제가 이제 다른 곳에 가요.”라고 하자, 유리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유리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렸습니다.

유리는―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제 손을 단단하게, 깍지 껴서 잡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한 번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유리의 손을 맞잡았습니다.

햇빛이, 햇살이 따뜻합니다. 카페에서와 똑같습니다. 따뜻한 것이 제 톱니바퀴 하나하나를 돌아가고 있는 느낌…….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갈 것만 같이 간질간질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유리는 다정해졌습니다. 습관처럼 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저를 끌어안는 손길은 자연스럽구요. 원래라면 뻣뻣하게 안겨 있었겠지만 그날은 왜인지 유리를 마주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유리의 가슴을 끌어안아 품에 안겨 있었어요. 어쩐지 유리가 굳어 버린 것 같습니다. 정 반대가 되었군요. 반대가 되면 굳어 버리는 유리가 웃겨서 저는 빙긋 웃었습니다. 한 방 먹인 것 같기도 하고요.

꼼지락꼼지락 품으로 기어들어가자 왠지 유리가 한숨을 쉰 것 같긴 한데요. 한 방 먹어서 그런 걸까요? 어쩐지 떨리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는 유리에게 작게 속삭입니다.

 

유리, 잘 자요―…….”

 

저 또한 오늘은 그의 품에서, 함께. 대기 전력 모드로, 그러니까 자고 싶은 기분입니다.

 

다음 날, 엿새 되는 날에 유리는 느릿느릿 움직였습니다. 일어나자마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작게 신음을 내뱉으면서요. 유리는 언제나 깊게 잠들지는 못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조금 안타깝습니다.

잠을 잘 자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아예 호텔 식당에서 조식까지 챙겨 먹는 모습은 여유롭습니다.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은, 매번 일어나자마자 저를 끌고 부지런히 무언가를 타고 움직이며 이곳저곳 보여주려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그래. 오늘 갈 곳은 한 곳밖에 없거든.”

어디인가요?”

블리스 플레쳐의…… 연습실.”

 

연습실!

귀에 와 들리는 단어의 느낌이 색다릅니다. 연습실. 블리스 플레쳐의 연습실. , 연습실. 그곳에 가면 저는 또 어떤 기억을 느끼게 될까요, 어떤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곳에 가면 제, 바이올린도 있나요?”

있어.”

 

바이올린까지 있다니, 그럼 드디어 연주를 할 수 있겠군요……! 저는 바이올린 연주용 안드로이드지만, 그것을 손에 쥔 지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원래의 제가 쓰던 바이올린이라고 하니 더 떨립니다. 저는 그것을 눈감고도 상상할 수 있어요. 잠들어 있는 동안, 그것을 연주하는 상상을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했거든요.

손에 착 잡혀 들어올 목이며, 잘 튜닝된 현, 송진가루를 묻힌 활털, 몸통에서 울리는 소리와 제가 현을 잡을 때마다 변화하는 음계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어떤 이는 처음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고 하기도 합니다. 저는 등줄기를 타고 기분 좋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 그것을 즐기지만요.

연주하는 동안, 저는 저만의 세계에 홀로 서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는 않아요. 외롭지 않습니다. 음악이 함께 있으니까요…….

관객들은 모두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 모든 세계가 제 연주로 충돌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주는 세계와 세계의 충돌입니다.

 

블리스?”

 

눈을 감고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잔뜩 생각했고, 상상 속에서 실제로 연주했습니다. 연주는 기쁜 일이기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고요.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희, 빨리 가요.”

 

떨리는 마음이 상기된 얼굴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제 양손을 꽉 깍지 껴, 유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최대한 빨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