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유리를 만나러 가는 길, 저와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유리는 새벽 내내 저와 얘기하느라 두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말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원본을 만나러 간다는 어떠한 중압감이 유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원본이 이 임무가 끝나고 나면…… 저와 유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요. 도구 취급받는 저와 유리의 목숨은 원본에게 달려 있습니다.
“널 찾고, 일주일간 보호하며 이곳저곳 데려간 다음에 그 새끼한테 데려가는 게 내게 내려진 명령이었다. 날 만든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이상은…… 내게 말해주지 않아서 나도 몰라.”
그래서 저는 혹시 몰라 블리스 플레쳐의 연습실에 있던 바이올린을 들고 가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유리는 “맘대로 해. 그건 네 거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소중히 챙긴 바이올린은 케이스 안에 얌전히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몰래, 저는 그곳에서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것도 하나 더 챙겼습니다. 두 유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유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외진 곳의 회색빛 건물이었습니다. 거대한 건물은 창문이라고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인적이라고는 아무도 없었고, 주위에는 그 건물뿐이라 황량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건물 주변을 감싼 높은 담들은 마치 건물을 보호한다기보다는 가두듯이,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뇌를 보관하고 보호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수용하고 배제시켜놓는 장소 같았어요. 무섭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유리는 익숙하게 입구에 자기 지문과 홍채를 인식하고, 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 아니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깨끗함입니다. 무채색의 내부는 그 흔한 인조 화분 하나도 없었고, 사람이 생활할 때 필요한 가구들도 전부 없었습니다. 실험실 아니면 감옥 같았습니다. 끔찍한 공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쨌든 원본 유리는 ‘뇌’만 있으니까요…….
삭막하고 텅 빈 내부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서 유리는 점점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어떤 흔들림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유리를 봐 왔잖아요.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거부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매만지기에, 저는 유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저 칩과 함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칩이 언제든 뇌를 태워서 클론을 죽여 버릴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도요. 언제든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삶을 살아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썩 좋은 기분은 아닐 거란 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용히 유리의 손을 잡았어요. 유리는 갑자기 손을 잡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맞잡은 두 손을 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이― 웃었어요.
마침내 어느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유리는 멈춰 섰습니다. 직감적으로 저는 여기 안에 ‘진짜 유리’― 원본 유리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손을 꽉 맞잡은 유리가 속삭이듯 말합니다.
“도망칠까, 블리스. 귀 안으로 긴 꼬챙이를 넣어서 후벼 파든, 머리에 드릴을 박든…… 아니면 반병신이 될 걸 각오하고서라도 머리를 후려쳐서, 칩을 부숴 버리고……. 너랑 도망칠까.”
흔들리는 눈동자로 유리가 저를 내려다봅니다. 그 눈에는 불안과 슬픔과 공포와 분노가 깃들어 있습니다. 간절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봅니다. 금방이라도 제게서 승낙하는 말이 나오길 바라면서요.
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계속해서 쫓기는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마자 저 뇌를 없앨게. 내 머리를 날려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말도 저는 부정합니다.
“그러지 말아요, 유리.”
“―아니면 너라도.”
유리가 초조하게 내뱉습니다.
“난 이제 들어가면 저 새끼한테 몸을 뺏길 거라고…….”
“유리.”
저는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한 뺨을 손바닥으로 감쌉니다. 다정하게 그 이름을 입에 담습니다.
“유리, 나의 유리.”
뭐가 되었든 간에 우리는 마주해야 합니다. 저는 유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활짝 웃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리 둘에게 아무것도 못 하게 할게요. 유리를 닮아서 원본 유리도 분명 착할 거예요. 안 그러면 제가 혼내 줄게요.”
그렇게 말하면서요.
유리는 제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줄곧 불안에 가득 차 있던 얼굴이 잠깐이나마 풀리는 것을 보니 마음에 안도감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표정으로 유리는 이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무거운 문을 천천히 열기 시작합니다.
원본 유리를 만날 차례입니다.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가자마자 유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습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억지로 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립니다. 밤의 유리입니다. 저는 서글픈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갑니다.
거대한 방 안에는 수많은 기계장치들이 있었습니다. 빛 하나 없는 방에는 기계가 발하는 푸른 빛 만이 앞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듭니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마어마한 전력이 이 방에 공급되고 있을 겁니다. 방 한가운데에는 사람 한 명 정도 높이의, 긴 원통형 수조가 있습니다. 미세하게 보글거리는 소리가 날지도 모릅니다. 뇌수액과 비슷한 액체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거겠죠.
투명한 수조에는 이상한 케이블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천천히 다가갈수록 뚜렷하게 존재를 과시하는 회분홍색 뇌에는 전극이 붙어 있었습니다.
웃으며 저를 안내한 유리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봅니다. 클론의 육체로 뇌만 남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이게 나야.”
유리가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통에 등을 기대고 저를 올려다봅니다. 저도 유리의 옆에 앉았습니다. 유리가 다정하게 저를 부릅니다.
“블리스.”
그 안에는 애정뿐 아니라 체념과 후회와 미안함과 안타까움, 간절함……. 그런 것이 들어 있었기에 저는 그동안 밤의 유리가 저를 부를 때마다 그렇게 서글프게 느껴졌던 겁니다.
“징그러운 꼴이지. 난 죽었어야 해. 그때 너 대신 죽지 못해서…… 죽지 않고 이만큼이나 살아왔을 뿐이야. 뇌의 기능도 이제 곧 한계야.”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듯이 내뱉은 그가, 눈을 감고 살짝 웃습니다.
“그래서……. 네가 날 죽이길 바랐다. 네 손으로 나를 잔인하게 죽여 줬으면 했어. 나 때문에 죽은 블리스를 위해서라도―. 그뿐이야.”
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아마도 무척이나 슬픈 얼굴일 겁니다.
그 제안에 대답하기 전에, 저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그리고 제 앞의 유리만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물어봅니다.
“유리. 블리스 플레쳐는 어떻게 죽었나요?”
제 질문에 유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듭니다. 유리는, 고개를 떨구고는 양 주먹을 꽉 쥡니다. 그가 자책이 깃든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씹어내듯 뱉어냅니다.
“나 때문에 죽었어. 나를……. 나를 죽이려던 놈이 있었는데, 블리스가 가로막고……. 대신 총에 맞았지.”
유리가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핏빛 같습니다. 자책의 핏빛입니다.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의 아들의 머리에서 흐르는 붉은 피 같아요.
저는 퍽 다정한 목소리로 유리에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유리와, 유리와, 저와, 저를 위해서요.
“유리, 제가 죽은 건 깨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블리스 플레쳐가 살아 있던 건 백 년도 전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그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저라면…….”
저는 한번 말을 끊고 유리를 살폈습니다. 유리는 우울한 눈빛으로 제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 안의 푸른빛들 때문에 유리는 불쌍할 정도로 창백해 보입니다.
“저라면. 유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 같은 걸 적어 뒀을 거예요. 당신이 킬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저는 신중한 성격이니까.”
저는 제가 찾은 것을 조심스럽게 주머니 속에서 꺼냅니다.
유리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 찹니다. 이런 표정은 모든 유리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며시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숨길만한 곳을 찾았어요. 유리. 당신은 철저한 킬러고 괜찮은 보디가드지만 탐정에는 소질이 없는 게 분명해요.”
작게 웃으며, 저는 편지를 유리에게 건넸습니다. 유리가 덜덜 떨리는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듭니다. 한 장의 접혀 있는 편지를, 유리는 감히 만질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내려다봅니다.
“피아노 안에 들어 있었어요. 유리, 피아노를 배웠었죠? 한 번이라도 쳤으면 알아차렸을 텐데.”
“……아니. 일부러, 하나도, 손대지 않은 거야. ……죽게 만든 사람이, 물건에 손을 대는 건 싫어할 테니까.”
유리가 헐떡이듯 말했습니다.
“싫어할 리가요.”
“멋대로, 읽었나?”
“봉해져 있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이 한 장뿐이었어요.”
저는 유리에게 편지를 건넸습니다.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합니다.
“읽어 줄 수 있겠어?”
기꺼이.
저는 다시 편지를 집어 듭니다. 그리고, 살짝 웃어 보이며 유리의 옆에 앉아, 나지막하게 편지를 읽어 봅니다.
유리에게
당신이 이걸 보고 있을 때 즈음이면 저는 죽었겠죠?
이런 말로 시작하는 건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렇게 쓰고 있게 되다니.
알죠, 유리.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저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말했으니까요. 이 일은 한번 시작하면 그만두기 매우 힘들다고요. 살인자들끼리는 서로 도망가는 것을 허용치 않으니까요. 한번 발을 들이면 그때부터 영영 포식자로만 살아가야 한다고. 등을 보이면 사냥감이 되어, 죽음뿐이라고. 저는 그 말을 듣고 영영 그렇게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리는 저를 위해 기꺼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려고 했던 거죠? 제가 너무 약해서. 유리 혼자만이라면 그렇게 누군갈 죽이면서 살아남았겠지만. 제가 곁에 있어서.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미안해요.
화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런 선택을 한 나를 자책하지도 않아요.
한낱 인간의 생과 사. 당신은 다른 이들의 죽음에 관여했고 오늘 저는 그런 당신의 목숨을 관장해 보려고 해요.
맞아요, 유리. 저는 꿈에서 당신의 죽음을 보았어요.
(당신도 알고 있듯이― 제 안 좋은 예지몽은 전부 맞아떨어지니까요.)
이 모든 게 단순한 꿈에 불과하다면, 저는 열심히 쓴 이 편지를 찢어서 버려 버리겠죠.
예지는 바꿀 수 없을까요?
만약 내가 대신 끼어든다면―… 당신은 살아날까요.
그렇다면 부디, 당신이 살아나기를.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며,
언제나 유리를 사랑하는
당신의
블리스 살티코프
“블리스…….”
유리가 간신히 제 이름을―아니, 그의 블리스를 부르며 침음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금방이라도 유리가 눈물을 흘릴 것 같았어요.
저는 제가, 그리고 원래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해 봅니다. 유리는 말없이 제 말을 듣고만 있습니다. 어쩌면 속죄의 끝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1230명이나 되는 자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었다는 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클론이 아니라, 진짜 자기 자신을.
“그러니까 유리. 속죄의 의미로 제게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은 그만 둬 주세요. 제가 살려낸 목숨이잖아요. 설마 제가 유리 때문에 죽었다고 당신을 원망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유리가 말없이 큭큭 웃습니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 옆에 앉아서 유리를 한참이나 바라봤습니다.
몇 분이 지나서, 유리는 입을 열었습니다.
“처음에, 복수를 다 끝내고…… 자살하려고 했어. 그 다음엔 로봇이라도 좋으니까 너를 찾아서 날, 날 대신 죽여 달라고 할 셈이었고. 날 죽이고 싶을 테니까.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블리스는 사람을 잘 죽일 수 없지만, 넌 로봇이니까, 그게 속죄 대신이라고.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는데.”
“유리는 바보군요.”
제 말에 유리가 저를 쳐다봅니다. 저는 확신을 담아 내뱉습니다.
“제가 유리를 죽일 리가 없잖아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유리를 죽일 리가 없는데.”
“맞아. 그거였어. 그랬어, 너는…….”
“그리고 유리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죽여가면서까지 속죄하기를 바랐을리도 없어요.”
제가 말할 때마다 유리의 표정이 변합니다. 울 것 같은 표정입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울지 않습니다. 눈가가 벌개질 뿐입니다.
이윽고, 유리는 어떤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습니다.
“블리스, 블리스…….”
우는 것처럼 그는 그 이름 석 자를 내뱉습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통에 기대어, 그는 저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진짜 블리스 플레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죠.
그를 위해 죽은 블리스 플레쳐를, 그를 용서했을 블리스 플레쳐를, 영원히 그를 사랑하는 블리스 플레쳐를.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는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저는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마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지쳤어…….”
두 눈을 감고 유리는 제 귓가에, 한탄처럼 작게 말을 내뱉었습니다.
“블리스.”
그리고는 저를 불렀습니다.
“연주를 해 줘.”
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유리’가 들을 마지막 곡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웃어 주었습니다.
“네.”
천천히 일어서자, 유리의 시선이 저를 따라 올라옵니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인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기쁨과 회한이 떠올라 있습니다.
그를 위해, 가져온 바이올린을 조심스럽게 케이스 안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천천히 선율을 연주합니다.
제 기억 속에서 블리스 플레쳐가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연주했던 곡이에요.
유리도 이 곡을 들으면서 분명 기뻐했을 겁니다.
다정하게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듯이― 선율은 흐릅니다.
눈을 감고 유리는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기억이 지나가고 있을까요.
행복했던 기억만이 떠오르기를―
그리하여 고통받던 그가 편안해지기를…….
저는 간절히 바랐습니다.
한참 연주는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곡이 끝나자, 작은 미소를 띄운 유리가 제게 부탁했습니다.
“사랑하는 블리스……. 나의……. 블리스 살티코프. 전원을 꺼 줘. 부탁이야. 자고 싶으니까…….”
“……아주 깊고 오래 잠들겠군요.”
“그래……. 이번엔 깨지 않고 잠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저는 뇌가 둥둥 떠 있는 통의 전원을 유지하는 스위치에 손을 올렸습니다. 눈을 감은 유리는 편안한 표정입니다.
“잘 자요, 유리. 좋은 꿈 꾸기를.”
“안녕, 블리스. ―내 사랑.”
저는 자장가를 흥얼거렸습니다.
전원 스위치가 내려갔습니다.
지금껏 블리스 플레쳐만을 떠올리며 저 통 속에 고정되어 고통받은 유리의 뇌는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제가 쓴 편지는 땅바닥에 서서히 떨어집니다. 이 편지는 이곳에 두고 가는 것이 좋겠어요. 블리스 플레쳐의 바이올린도요. 두 물건이 유리의 무덤이 될 이곳에, 영영 같이 묻혀 있도록…….
―안녕히, 유리.
오랜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클론의 육체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태어날 때부터 유리를 속박하던 또 하나의 그는 마침내 죽었습니다.
유리-1231은 눈을 떴습니다. 이제 존재하는 유일한 유리입니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해 보이는 눈동자입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봅니다.
“일어나요.”
뺨에 손을 올리면, 그는 차분해진 눈동자로 저를 담습니다. 어쩌면 공허해 보입니다. 그는 이제 자유의 몸입니다. 어디로 가게 될까요, 목적 없이 무엇을 하며 살게 될까요.
저는 나지막하게 그를 불러 봅니다.
“……유리.”
이름을 부르자, 어쩐지 하고 싶은 말이 생겼습니다. 유리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어설 수 있나요?”
유리가 일어나려다가…… 휘청거립니다. 제가 팔을 내밀자, 유리는 망설이다 손을 잡고 일어섭니다.
“이제 가요.”
“……어디로?”
“어디든 좋아요. 어디든 우리의 집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발걸음을 뗍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는 마치 왈츠 같은 리듬입니다.
딱 맞잡은 두 손은 절대 떨어지는 일이 없이, 유리는 보폭을 서서히 제게 맞춥니다.
이제야, 새로운 곡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